[미디어펜=김규태기자] 28일 서울 도산안창호기념관에서 열린 유관순 열사 관련 기자회견에서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대한민국 역사문화원 원장)은 유관순 열사와 관련된 역사적 쟁점을 소개해서 국민들의 지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다는 취지를 밝혔다.

이정은 회장은 “유관순을 과장되게 포장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오해”라면서 “지금은 한 페이지에 연대기 형식으로 짤막하게 기술하기 때문에 주요 인물에 대한 서술이 없는 편이지만, 유관순 열사는 ”독립운동사의 상징적 인물로 언급해 주고 심화학습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유관순 열사와 관련한 질의 응답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 유관순 열사는 실제 3․1운동에 참여한 인물인가?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기록표, 호적등본, 재판기록문 등이 남아 있어 실존 인물로 확인된다(천안시 유관순기념사업관 전시).

독립유공자 유관순 진위 여부 확인자료

(1) 국가기록원 형사사건판결자료.

(2) 유관순 열사와 함께 수감생활했던 어윤희 여사의 증언.

(3) 동네에서 함께 3.1운동을 했던 조병호의 회고기록.

(4)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 유관순 서대문 수형카드 원본(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사진자료.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서 검색 확인 가능.

(5) 유관순 판결문 해당 부분 : 원본은 국가기록원 소장, 현재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에서 검색 확인 가능. 1919년 6월 30일 서울의 복심법원(復審法院)에서 열린 유관순 외 10명에 대한 판결문 가운데 유관순은 관련 부분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음.

- 3.1운동에 참여했다면 유관순 열사는 어떤 활동들을 했는지?

충남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시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함께 만세를 부르며 독립의지를 표명했다. 학교 교장이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를 넘어서 운동에 참여했다.

- 혹자는 친일파였던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이 자신의 친일 행적을 무마시키기 위해 이화여고 학생 중에 발굴한 인물이 유관순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수형기록표나 재판기록표 등 여러 입증 자료들이 그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 유관순 열사에 대한 내용이 교과서마다 제대로 기술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3․1 운동 때 만세시위를 하다가 죽은 사람이 수천 명에 달하므로 유관순도 그 중의 한명으로 생각함으로써 유관순의 행적이 너무 과장되었다고 일부가 주장한다. 하지만 유관순은 169cm 장신의 어린 나이 여학생으로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독립운동사에 있어 여성 인물의 발굴이라는 측면에서도 유관순 열사는 독립운동의 상징적 의미가 크다.

   
▲ 사진은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중 유관순 서대문 수형카드 원본이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서 검색 확인 가능하다./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


- 일제강점기 유관순의 행적에 대해 교과서가 어느 정도까지 서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역사교육의 인물사 학습은 그 인물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통해 가치․태도를 함양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인물의 행적이나 관련 사진 제시, 역사적 의미 등을 생각해 보도록 하는 탐구 활동 등을 제시하여 주는 것이 적절하다.

- 최근 유관순 관련 광고에서 중․고등학생도 유관순에 대해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어떠한가?

유관순이 독립운동사에서 가지는 의미나 상징성으로 볼 때 초등학교에서 배웠더라도 중․고등학교에서도 독립운동사의 상징적 인물로 언급해 주고 심화학습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 사진은 유관순 판결문 해당 부분. 현재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에서 검색 확인이 가능하다. 당시 1919년 6월 30일 서울의 복심법원(復審法院)에서 열린 유관순 외 10명에 대한 판결문 가운데 유관순은 관련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사진=국가기록원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