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에 맨 먼저 등장한 유관순은 '옥중 타살', 부모는 시위 중 피살

[미디어펜=이상일기자] 유관순 열사가 빠진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은 작년 8월 교육부의 교과서 발행체제 토론회에서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이 토론회는 고등학교 검정 역사 교과서 8종 중 4종에서 유관순이 빠진 원인 등을 논의하는 행사였다.

토론에 나선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유관순의 공적이 과장됐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교과서 누락은 "유관순이 친일파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이라는 최근 연구결과 때문"이라는 주장도 했다. "북한에서는 유관순을 모르고, 우리 교과서에도 1950년대에야 들어갔다"는 연구 결과도 소개했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와 보수 진영은 즉각 반발했다. 유관순 누락을 검정 역사 교과서의 '좌편향' 근거로 들며 국정 교과서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였다.

비슷한 논란은 5년 전에도 있었다.

2010년 1학기를 앞두고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등이 술렁거렸다. 새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유관순 전기문이 주시경 전기문으로 교체될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교육과학기술부는 "교과서 수록 인물은 집필진이 결정할 일"이라는 소극적은 태도를 보이다 결정을 번복해 5학년 2학기 교과서에 유관순을 다시 싣기로 했다.

국정교과서인 초등학교 교과서에서조차 유관순이 사라질 뻔한 것이다.

유관순 열사 관련 단체 등에서는 이런 현상을 교과서 집필진의 편향된 역사관 탓으로 비난했다.

박충순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은 28일 "열사가 기독교인이고,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 때문에 반미 성향의 집필진이 열사를 깎아내리면서 교과서에서 뺀 것"이라고 지적했다.

교과서 집필진은 그렇지 않다고 해명했다. 친일파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 때문이 아니라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에서 유관순을 충분히 다뤘기에 고교 과정에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관순이 교과서에서 사라진 이유가 무엇이든 그의 영웅적인 행적은 판결문과 형무소 수형기록 등에서 충분히 입증된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1919년 6월 30일 유관순의 항소심(경성복심법원) 판결문은 3·1운동 공적을 자세히 보여준다.

   
 
   
▲ 사진은 유관순 판결문 해당 부분. 현재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search.i815.or.kr)에서 검색 확인이 가능하다. 당시 1919년 6월 30일 서울의 복심법원(復審法院)에서 열린 유관순 외 10명에 대한 판결문 가운데 유관순은 관련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사진=국가기록원 소장

"유관순은 경성에 있는 이화학당 생도인데, 대정 8년(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중략) 독립시위운동을 하고 있음을 보고, 같은 달 13일 고향으로 돌아와 같은 해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 병천시장(아우내장터) 개시를 틈타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고, 자택에서 태극기(압수품 1호)를 만들어 이를 휴대하고 시장으로 달려가 무리를 지어 조선독립만세라 외치고 독립운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했다"

군중의 희생을 막으려고 일제의 총부리 앞에 온몸을 던진 행적도 기록됐다.

"만세를 부를 때 유관순의 아버지도 헌병의 검에 찔려 살해되었다. 헌병이 군중에게 발포하려고 총을 겨누고 있을 때 (유관순) 자신은 양쪽을 제지하기 위해 헌병이 소지한 총을 잡았다. (중략) 만세를 부른 후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아버지의 시체를 보고 화를 내며 '나라를 되찾으려는 정당한 일을 하는데 어째서 군기를 사용하여 민족을 죽이느냐'고 말하였다."

판결문에는 유관순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온다. 일제가 17세 소녀의 이름을 맨 앞에 기록한 것은 최고 저항 인물로 지목했기 때문으로 기념사업회 등이 분석했다.

유관순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순국했다.

사망 원인은 그동안 널리 알려진 고문 후유증이 아니라 구타에 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기록원이 2013년 11월 처음 공개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를 보면 "만세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被檢)돼 옥중에서 타살(打殺) 당함"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감옥에서 맞아 죽었다는 의미로 읽힌다고 국가기록원은 설명했다. 이 명부는 해방 이후인 1952년 유족의 진술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 헌병이 발포하고 칼을 휘두를 당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가 희생됐음을 보여주는 정황도 있다.

사망자 명단에 유중권 바로 옆에 '李氏'라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주소와 순국 장소 및 상황 등이 유중권과 일치했다. 친오빠와 4촌 오빠, 삼촌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심한 고초를 겪었다.

유관순 일가족이 시위 현장과 감옥 등에서 대거 희생됐다는 점에서 3·1운동의 아이콘인 셈이다.

일제강점기와 1940년대 후반에 민간에서 생산된 유관순 기록도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어교과서 제작에 참여한 소설가 전영택은 1946년경 유관순의 일생을 유족으로부터 접하고, 1948년 전기 '순국처녀 유관순전'을 출간했다.

'친일·친미 성향의 인사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이라는 주장은 진실과 동떨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책이다.

천안의 향토 사학자 임명순씨는 "유관순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3·1운동 기미독립선언서 공약3장의 정신을 그대로 구현한 드라마틱한 인물과 사건이다"고 평가했다.

그는 "유관순의 행적을 널리 알린 인물 중에 친일인사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며 유관순과 아우내 만세운동의 가치를 훼손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