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구 좌석 음주 제한 ‘무방비’…비상시 승무원 도와 대피 지원 의무
“술 마셔도 문제없다?” 국내 항공사 비상구 좌석 정책 허점 지적
‘넓은 자리’라는 이름의 비상구 좌석, 추가 요금 받고도 안전 책임은 불투명
[미디어펜=이용현 기자]“비상구 좌석 앉은 사람이 계속 맥주를 마시더라고요. 1~2캔도 아니었어요. 이게 맞는 건가요?”

최근 회원 수 200만 명이 넘는 한 대형 여행 커뮤니티에 이러한 글이 올라왔다. 동남아 지역 항공편을 이용한 여행객의 경험담이다. 그는 “비상구 좌석은 위급 시 승객 탈출을 돕는 자리로 알고 있었는데, 술 마시는 모습을 보니 불안했다”고 토로했다.

   
▲ 비상개폐 된 아시아나 항공기의 비상구. 사진=연합뉴스

◆구조 의무 있는데…비상구 좌석 음주 허용

18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국내 대형항공사(FSC)와 저비용항공사(LCC)들은 현재 비상구 좌석을 포함해 모든 탑승객에게 주류를 판매 또는 제공한다.

통상 비상구 좌석 탑승 승객은 수속, 탑승 후 착석 시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승무원을 도와 비상구를 개폐하고 다른 승객들의 우선 탈출을 도와야 한다는 안내를 대면으로 받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안내가 단순한 절차로 여겨지거나, 승객들의 행동에 직접적인 제약으로 작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항공사 측이 책임 안내는 형식적으로 진행하면서도 정작 안전과 직결된 행위에는 별다른 기준이나 법적 규제가 존재하지 않아서다.

항공사들은 비상구 좌석이라고 해서 음주 자체를 제한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한 항공사 관계자는 “비상구 좌석은 항공보안법상 일정한 자격 기준을 갖춘 성인만 탑승할 수 있으며, 주류 제공은 해당 기준을 충족한 승객에게 차별 없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국토교통부 ‘항공보안법’과 ‘항공기 운항기술기준’ 등에는 비상구 좌석 승객의 음주를 제한하는 규정은 없다. 다만 항공사는 승객의 음주 상태가 안전 운항에 지장을 줄 경우 서비스 중단, 좌석 이동 등 자체적인 조치를 취할 수는 있다.

물론 해외에서는 일부 항공사가 공항 내 음주 제한을 강화하는 움직임도 있다. 유럽의 라이언에어(Ryanair)는 지난해 4월 한 승객의 음주로 인한 항공편 회항 사건을 계기로, 유럽연합(EU) 당국에 승객당 음주 횟수를 최대 2잔으로 제한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일부 항공사에 국한된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등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항공 관련 정책을 운영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비상구 좌석에 한해 주류 판매나 제공을 제한하는 명확한 국내외 법령이나 규정은 마련돼 있지 않다”며 “해당 사안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논의된 사례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법적 규정이 부재한 만큼 승객 개별 상황에 따라 대응하고 있으나 일관된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광옥 항공대 교수는 “비상구 좌석은 단순히 넓고 편한 자리가 아니라 위급 상황 시 승무원을 돕는 책임이 부여된 자리”라며 “ 현재 주류 판매가 제한되지 않는 것은 안전 원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이어 “비상구 좌석 승객에게 주류 제공이 제한된다는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지 않은 점도 문제”라며 “체크인이나 예약 단계에서부터 ‘비상구 좌석 승객에게는 주류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전 고지를 의무화 하는 방식도 유효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김포공항 전경./ 사진=한국공항공사

◆ 비상구 좌석, 요금은 ‘프리미엄’...의무도 지켜야

비상구 좌석은 단순히 안전 책임이 부여된 자리일 뿐 아니라 국내 항공사들 사이에서 추가 요금을 받는 ‘프리미엄 좌석’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대한항공을 제외한 대부분의 항공사는 비상구 좌석을 일반석보다 높은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대한항공의 경우 지난해 12월 비상구좌석을 포함한 소비자 선호 좌석을 ‘엑스트라 레그룸’으로 명명하며 추과금을 부과하려 했으나 소비자와 업계에서 사실상의 운임 인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철회됐다.

현재 국내 주요 항공사들의 비상구 좌석 추가 요금은 노선과 항공사별로 차이가 있지만 국제선의 경우 대부분 2만 원에서 5만 원 사이, 국내선은 5000 원에서 3만 원가량 추가 요금을 받는다.

비상시 승무원을 도와 대피 지원 의무가 부여되는 비상구 좌석이 현실은 ‘넓은 좌석’이라는 이유로 웃돈을 받고 판매되는 이른바 ‘프리미엄’ 좌석으로 소비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해당 문제가 지적된 게시글에서는 “비상구 좌석이 돈만 내면 다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됐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비상구 좌석은 전방좌석과 마찬가지로 일반석 대비 공간이 넓어 소비자 선호도가 높고,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역시 업계에서는 ‘비상구 좌석 주류 판매 및 제공’과 마찬가지로 소비자 혼란을 초래하고, 안전 책임과 상충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김광옥 교수는 “비상구 좌석은 단순히 돈을 더 내고 살 수 있는 ‘프리미엄 좌석’이 아니라 위급 상황에서 승무원을 돕는 중요한 역할이 부여된 자리”라며 “요금을 더 받는 구조 자체가 안전개념과 다소 상충된다”고 말했다.

[미디어펜=이용현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