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연지 기자]미국 이민당국의 대규모 단속 사태가 한국 기업 전반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이번 대규모 단속 과정에서 합법적인 비자를 소지한 한국인 근로자도 구금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자동차·배터리를 넘어 반도체·철강·항공 등 국내 업계 전반으로 긴장감이 확산하는 모습이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미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은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엘러벨(서배나 인근) HL-GA 합작 배터리 공사 현장을 급습해 한국인을 포함한 475명을 체포했다.
구금됐던 한국인들이 귀국길에 오르면서 이번 사태가 겉으로는 진정 국면에 들어섰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투자 일정 차질과 비자 불확실이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재입국 불이익 해소와 함께 신규 비자 신설 협의를 병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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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이민 단속 당국이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벌인 불법체류·고용 단속 현장 영상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사진=ICE 홈페이지 영상 캡처 |
◆ 합작공장 차질·배터리 공급망 불안…정의선 "투자 축소 없다"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이 조지아주에 짓고 있는 합작 배터리 공장은 약 76억 달러가 투입된 초대형 프로젝트다. 당초 올해 말 완공, 내년 양산 돌입이 목표였지만 이번 단속으로 일정 지연은 불가피해졌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은 "이번 일로 최소 2~3개월의 지연이 예상된다"며 "공장 건설 단계에는 전문 인력이 필요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대체하기 어려운 기술과 장비가 많다"고 말했다. 구금된 인력 상당수가 설비 설치와 시운전에 필요한 기술자였던 만큼 대체 인력 투입과 일정 재조정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비록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현대차에 미국 시장의 전략적 중요성은 변함이 없다"며 지속적 투자를 강조했다. 정의선 회장도 "미국은 그룹에 가장 크고 중요한 시장"이라며 "추가 투자와 기여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와 미국이 함께 더 나은 비자 제도를 만들길 바란다"고 언급하며 제도 개선 필요성도 강조했다.
현대차그룹은 신규 공장 가동이 늦어지더라도 조지아주 커머스의 SK온 합작공장 등 기존 조달망을 활용해 공급 차질을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업계는 단기 충격은 불가피하지만, 현대차·LG엔솔의 미국 내 중장기 투자 기조 자체는 유지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사태로 배터리 업계 전반의 투자 일정과 인력 운용에도 불확실성이 커졌다. 일부 협력업체 인력이 귀국하거나 투입이 지연되면서 공정 속도가 늦어진 현장이 나타났고, 하청 관리 체계의 법적 리스크도 드러났다. 업계는 이번 사건이 배터리 공급망 전반의 구조적 불안 요소로 확산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LG엔솔은 HL-GA 합작공장 외에도 미시간·오하이오·애리조나에서 단독·합작 공장을 건설 중이다. 조지아 공사는 큰 차질을 빚었지만 다른 지역 공사들은 일정이 지연되더라도 진행은 이어지고 있다. 삼성SDI는 인디애나에서 스텔란티스·GM과, SK온은 켄터키·테네시·조지아에서 포드·현대차와 합작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LG엔솔과 SK온은 가동 시점을 2026년, 삼성SDI는 2027년으로 잡고 있다. 사건 이후 LG엔솔은 현지 파견 일정을 전면 재조정했고, SK·삼성도 비자 규정 점검에 들어갔다.
◆ 반도체·철강·조선·항공까지 불안감 확산…비자 리스크 투자 변수로
불안은 반도체 업계로도 번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대미 투자는 현지 고용 창출과 공급망 다변화라는 미국 정부 정책 기조와 맞물려 지원을 받아왔지만, 초기 가동 단계에서 한국 본사 인력 의존도가 높다는 점이 이번 사건과 겹치며 주요 변수로 떠올랐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테일러에 약 25조 원을 투입해 첨단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현재 초기 장비 반입과 셋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2025년 하반기 본격 가동을 목표로 한다. 공정 안정화를 위해 대규모 한국 엔지니어 등 기술 인력이 투입될 예정이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 웨스트라파예트에 약 5조4000억 원을 투자해 HBM 후공정(고급 패키징)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2028년 하반기 양산을 목표로 한다. SK하이닉스는 공장 착공 전 단계로 당장 큰 영향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비자 지연이나 체류 규제 강화가 현실화될 경우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 있는 만큼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철강·조선 업계도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현대제철은 루이지애나주에 연간 270만 톤 규모 전기로 제철소를 건설할 계획으로 2029년 상업생산 개시를 목표로 한다. 한화는 지난해 필라델피아 필리조선소를 인수하고 50억 달러를 투입해 설비 현대화와 생산능력 확대에 나섰다. 두 회사 모두 파견 인력 비자 확보가 핵심 과제로 꼽힌다.
항공업계 역시 대응에 나섰다. 대한항공은 미국 노선을 오가는 승무원에게 여권과 비자를 상시 소지하고 체류 목적을 준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D·C-1 비자를 갖고 있지만, 단속 강화 분위기에 선제적 조치를 취한 것이다.
◆ 정부-기업, '비자 신설' 요구 확산…제도화 없인 불안 반복
한국 정부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 전문 인력 전용 비자 신설을 미국 측에 제안했다. 단기 상용(B1)·ESTA 비자로 근로를 하던 과정에서 법적 공백이 드러난 만큼, 합법적 파견 경로를 마련해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다.
기업들도 대응에 나섰다. 완성차·배터리·반도체 업체들은 출장·파견 일정을 전면 재점검하고, 협력사·하청까지 포함한 체류 관리 매뉴얼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초기 가동 단계에서 필수적인 본사·장비사 엔지니어 투입 절차를 표준화하고, 업무 범위 준수 체크리스트를 마련하는 등 내부 통제 강화를 서두르고 있다.
업계는 제도 개선이 이뤄질 경우 B1·ESTA 남용을 줄이고, H-1B(전문직 취업)·L-1(주재원) 등 적합한 비자 트랙으로 전환이 용이해져 일정 리스크가 완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렇게 되면 공사·장비 설치·시험운전 단계의 인력 운용 안정성도 높아질 전망이다.
다만 제도 개편까지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미국 이민법상 새로운 비자 범주는 의회 입법 절차를 거쳐야 하고, 트럼프 행정부가 단속을 강화하는 현 상황에서 환경이 얼마나 우호적일지는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신설보다는 기존 비자 활용 범위 확대가 현실적일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업계에서는 정부-기업-현지 당국 간 상시 협의 채널 구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도 개선 속도가 늦어질 경우 최소한 사전 통보·행정 가이드라인을 통해 현장 혼선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투자 규모가 커질수록 인력 파견 리스크도 커진다"며 "이번 사태가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나선 안 된다. 제도화로 이어져야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 신뢰도가 유지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펜=김연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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