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용현 기자]최근 HD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조선 대기업들이 올해 임금·단체협약 교섭에서 역대급 규모의 잠정합의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하지만 업계 안팎에서는 노란봉투법이 조선업계에 ‘빠른 합의’를 부추기며 차후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파업 장기화로 인한 위약금·납기 지연 부담이 기업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손해배상 청구마저 제한된 만큼 조선사들이 노조의 고강도 요구안을 신속히 수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고착화될 수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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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가 지난 12일 오전 8시부터 8시간 전면 파업을 진행 중이다./사진=현대중공업노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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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 17일 HD현대중공업은 △기본급 13만5000원(호봉승급분 3만5000원 포함) 인상 △격려금 520만 원(상품권 20만 원 포함) △특별 인센티브 100% △HD현대미포 합병 재도약 축하금 120만 원 △고용안정 및 상생협약 체결 등을 담은 역대 최고 수준의 2차 잠정 합의안을 내놨다.
이는 앞서 각각 7월과 9월에 임단협을 조기 타결한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과 비교해도 더욱 파격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두 회사 역시 기본급 인상과 성과급, 격려금 등을 통해 ‘역대급’ 수준의 합의를 이끌어냈지만, HD현대중공업의 이번 안은 기본급 인상 폭과 일시금, 그리고 고용 안정 및 합병 기념 성격까지 포함해 전체적인 규모와 상징성이 한층 강화됐다는 분석이다.
결국 조선 3사가 모두 ‘역대 최고’라는 이름을 붙인 잠정합의안을 내놓으면서 업계에서는 노조가 매년 한층 높아진 기준을 바탕으로 새로운 요구안을 제시하는 선순환이 아닌 ‘상향 반복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내 조선사들이 임단협을 빠르면서도 높은 수준으로 끝내는 이유는 호황이 이어지고 있는 산업 분위기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조선업의 생산구조와 법·제도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데, 선박은 프로젝트성(대형·장기간) 생산품으로 납기 지연 시 계약서상 지체상금(위약금·LD) 부담이 즉시·대규모로 발생한다. 납기 지연은 조선사의 신뢰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에 단기 손실을 넘어 향후 수주 경쟁력까지 위협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계약 준수는 선주들의 핵심 평가 요소 중 하나”라며 “납기를 어겼다는 것은 어떤 사장이 있더라도 발주사 입장에서는 단지 약속을 어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결국 기업 입장에서는 임단협 난항으로 인한 ‘장기 파업 리스크’가 단순히 임금·복지 협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 매출과 시장 점유율을 잃는 중대한 리스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 노란봉투법, 잘나가는 산업 발목 잡을까
여기에 노란봉투법 역시 기업의 방어 수단을 제한하며 노조의 압력을 키웠다. 해당 법안은 원청·하청 관계를 포함하도록 ‘사용자’ 개념을 넓히고, 불법 쟁의 시 사용자 측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조항을 담고 있다.
입법 자체가 파업 억제 기제로서의 전통적 ‘손배 리스크’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파업 장기화로 인한 손실과 비용은 오로지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업계에서는 선박 납기와 위약금 등 실질적 손해가 임단협 과정에서 즉각 현실화되다 보니, 조선사들은 주요 파업 원인인 임단협에서 노조 측 요구안을 대폭 수용하고 신속히 합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면 정부(고용노동부)는 노조법 개정 이후 최근 사업장에서 발생한 파업들이 "노조법 때문이 아니라 임단협 과정에서 발생한 노사 간 입장차 가 원인"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법 개정 자체보다 각 사업장의 교섭 쟁점과 일정이 파업 발생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이유다.
하지만 업계의 생각은 다르다. 임단협 자체가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야 하는 과정임은 맞지만 이미 조선업은 파업 시 즉각적 손실이 발생하는 구조적 특성 때문에 출발점부터 노조의 협상력이 강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결국 노조 우위 구조가 이미 고착화된 상태에서 이번 노란봉투법 개정은 단지 기존 힘의 균형을 재확인해 준 셈이라는 지적이다.
업계 내 한 관계자는 “임단협은 구조 안정화에 목적을 두고 있지만 지금은 단편적 승·패로만 끝나고 있다”며 “노란봉투법에 의한 노조 우위 구조 속에서 기업들은 매년 역대 최고 수준의 협의안을 도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고 우려를 전했다.
[미디어펜=이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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