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사, 수출길 막히자 내수 의존도 확대…후판 가격 인상 ‘절박’
조선업계, 호황에도 후판 원가 부담…수익성 압박 지속
양측 맞붙는 전형적 줄다리기…협상 장기화 가능성
[미디어펜=이용현 기자]철강사와 조선사 간 후판 가격 협상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그동안 양측은 원자재 가격 변동과 조선업계 수익성 악화를 두고 팽팽히 맞서 왔다. 하지만 업계 일각에서는 이번 협상에서 더 절박한 쪽은 철강업계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에 이어 유럽연합(EU)까지 고율의 철강 관세와 무역 장벽을 예고하면서 수출길이 좁아졌기 때문이다.

   
▲ 철강사에서 생산된 후판./사진=연합뉴스

21일 업계에 따르면 EU는 이르면 10월 중순 강력한 철강 무역 보호 조치를 발표할 예정이다.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집행위원은 지난 18일(현지시간)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10월 중순까지 강력한 보호 조치를 채택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이 수입 철강 품목에 최대 50%의 고율 관세 부과를 추진한 데 이어 유럽까지 규제를 강화하면서, 철강사들이 후판 가격 협상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배경으로 꼽힌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의 직접적인 타깃이 중국산 저가 철강이지만 주요 수출국인 한국산 철강도 규제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이에 따라 철강사들은 내수 시장, 특히 대형 수요처인 조선업계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철광석·원료탄 가격 변동성에 환율 상승까지 겹치면서 수익성이 악화된 만큼 후판 가격 인상은 사실상 ‘생존 전략’이라는 게 업계 시각이다.

◆앓는 소리 나는 철강사, 조선업계는 ‘호황 속 원가 부담’

반면 조선업계는 최근 대규모 수주 호황을 누리고 있다. 기존 LNG 운반선에 더해 초대형 컨테이너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발주가 이어지며 글로벌 점유율 확대가 지속되고 있다.

문제는 원가다. 선박 건조 비용에서 후판이 차지하는 비중은 20~30%에 달한다. 철강사가 제시하는 인상안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수익성 악화는 불가피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일정 부분 인상은 불가피하겠지만 협상 과정에서는 이를 최대한 억제하려는 치열한 줄다리기가 반복돼 왔다”고 전했다.

실제 후판 가격 협상은 국제 시황과 원자재 가격을 두고 매번 갈등을 빚어왔다. 철광석과 원료탄 가격이 오르면 철강사들이 인상을 요구했고 조선사들은 낮은 선가와 고정된 계약 구조를 이유로 맞섰다. 과거에는 상·하반기 단위로 조정했지만 최근에는 변동성이 커지면서 분기 단위 협상이 사실상 정례화됐다.

다만 이번 국면에서는 철강업계가 상대적으로 더 절박한 입장에 놓였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조선업계는 풍부한 수주잔량을 바탕으로 일정 부분 원가 부담을 흡수할 여력이 있지만, 철강업계는 글로벌 보호무역 확산으로 수출길이 막히면서 단가 인상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조선사들은 이미 확보한 물량으로 손실을 일정 부분 상쇄할 수 있지만, 철강사들은 수출 물량이 급감할 경우 실적 악화를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양쪽 입장 대치... 후판 반덤핑 등 영향 미칠까

후판가격이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 중 하나는 후판 반덤핑 판정이다. 비록 일부 업체는 보세구역 판정을 받아 관세 유예 등 반덤핑 판정으로부터 자유롭다. 하지만  국내 시장의 후판 가격이 반덤핑 판정을 받아 전반적으로 오른 만큼, 조선사에도 비슷한 수준의 가격압박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아직 보세구역 판정을 받지 못한 조선사들은 가격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보세구역 판정을 받은 기업은 후판 수입을 늘릴 수 있겠지만, 후판이 반덤핑 판정을 받은 상황에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보세구역 신청은 했지만 아직 판정을 받지 못한 기업들은 가격 인상 압박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다만 철강사들이 원하는 수준의 인상이 현실화될지는 미지수다. 조선사들이 원가 상승분을 선가에 전가할 수 있을지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발주가 늘고는 있지만 선주들의 가격 압박도 만만치 않다.

조선업계 내부적으로는 블록 외주화 확대, 설계 효율화 등을 통해 후판 사용량을 줄이는 추세도 나타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후판 수요 자체가 감소할 가능성도 제기되면서, 철강사의 협상력이 제약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업계에서는 결국 이번 협상이 ‘철강의 절박함’과 ‘조선의 원가 부담’이 맞부딪히는 전형적인 줄다리기 양상으로 귀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조선업계가 글로벌 발주 호황으로 협상에서 다소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철강사들 역시 수출길이 막힌 상황에서 가격 인상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할 것”이라며 “양측 모두 물러서기 어려운 만큼 협상이 장기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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