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평균에 훨씬 못미치는 자급률…중국과 인도 수입 치중도 높아
정부 정책 유인 효과 미비…제약사들 자체적인 생존 전략 펼쳐
보건안보 개념으로 접근해야…미국, 원료의약품 내재화 기조
[미디어펜=박재훈 기자]국내 원료의약품(API) 시장이 환율 급등·지정학 리스크·해외 공급망 불안에 동시에 노출되면서 보건안보에 경고등이 켜졌다. 정부가 국산 원료 사용 시 약가 우대 혜택까지 내놓았지만 정책 효과는 미비한 수준이다. 자급률이 25% 안팎으로 머무는 가운데 업계와 정부의 체질 전환이 시급한 상황이다.

   
▲ ./사진=픽사베이


17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원료의약품 자급률은 2023년 기준 25.6%로 2022년의 11.9%에 비해 두 배 이상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선진국 평균 △미국 60%대 △일본 50%대를 크게 못미치는 수준이다. 단순 생산액 기준은 4조4000억 원으로 전체 의약품의 13.4%에 불과한데다 바이오 의약품용 특수 원료를 제외하면 실제 비율은 더 하락한다.

또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중국 37.7% △인도12.5% 등 두 나라에서 전체 수입의 절반 이상을 조달한다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따른 규제 변수 또는 코로나19 같은 팬데믹 발생 시 공급망이 위험해질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주요 해외 생산 거점이 멈추거나 수입 절차가 막히는 경우 아세트아미노펜 등 필수 성분 부족에서 시작해 국내 주요 제조사가 생산을 중단하거나 차질을 빚는 일이 반복돼 왔다.

백종헌 보건복지위원 소속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3월부터 정부가 국산 원료의약품 사용 국가필수약 약가우대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나 7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신청 제약사를 비롯해 품목조차 없다"며 "이는 곧 정책 유인이 효과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정부는 낮은 자급률 타개를 위해 지난 3월부터 국산 API를 사용한 필수약에 약가우대까지 시행했으나 효과는 전무하다. 이는 약가 차이가 수입 원료 대비 메리트가 전혀 없다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차라리 당장 생산라인 증설과 연구개발 투자 유도로 기업 동기를 자극하는 게 훨씬 빠를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제약사들은 시장 변화와 국가적 대응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생존 전략을 펼치고 있다. 대표적으로 유한양행은 자회사를 유한화학을 통해 길리어드, 화이자 등 글로벌 빅파마와 HIV·C형간염 원료 계약을 체결하며 2024년 누적 3650억 원을 돌파했다. 유한양행은 길리어드에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치료제 원료의약품, C형간염바이러스(HCV) 치료제 원료의약품 등을 공급하고 있으며 2026년 및 2027년 생산 물량에 관한 계약까지 체결했다.

이외에도 길리어드의 HIV 예방주사 예즈투고(레나카파비르)가 최근 유럽 품목허가를 획득했다는 점이 주목받는다. 미국 FDA(식품의약국) 승인에 이어 유럽까지 시장을 확대하면서 유한화학의 원료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에스티팜은 유럽 RNA 학회에서 차세대 하이브리드 효소 공정을 발표하면서 대규모 RNA 원료 수주에 성공했다. 해당 방식은 기존 순차적 합성 방식을 벗어나 효소로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유전자편집 치료제 CRISPR·CasX에 필수인 단일가이드 RNA(sgRNA)를 높은 순도로 저비용 대량생산할 수 있다. sgRNA 시장은 2030년 약 5000억 원 규모로 현재보다 5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원료 생산 정책이 단순 산업 정책을 넘어 보건안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은 바이 아메리칸 정책으로 특정 원료를 자국 조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원료의약품 내재화를 더욱 강화하려는 기조를 보이고 있다.

일본과 EU(유럽연합)도 국가 필수 성분에 보조금과 구매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다. 정부가 ‘혁신형 생산기업 지정’ 등 반도체 수준의 육성책으로 R&D(연구개발), 생산, 유통을 전방위로 지원하지 않을 경우 가까운 시일내로 원료 부족 사태가 반복된다는 우려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원료가 흔들리면 제약산업 전체가 흔들린다"며 "지금처럼 특정국 수입에만 의지하다간 보건과 산업이 동시에 위기일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미디어펜=박재훈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