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유태경 기자]
현장을 모르는 법은 재난이 된다. 노란봉투법 시행령을 둘러싼 산업계의 불안은 '우려'가 아니라 '현실적 경고'다. 이미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명령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한국 제조업은 원청 한 곳에 수백~수천 개 하청이 얽힌 구조다. 현대차의 사내·외 협력사는 약 8500곳, 조선 대기업(HD현대 기준)은 3900곳에 이른다. 건설업 또한 한 현장에 수십~수백 개 업체가 드나드는 것이 일상적이다. 이 복잡한 생태계 위에 정부는 "원청이 하청노조와 직접 교섭하라"는 의무를 올려놨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2·3조 개정안, 이른바 '노란봉투법'은 내년 3월 10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하청노동자도 원청과 직접 교섭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교섭을 어떻게, 누구와,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등 절차는 안갯속이었고, 현장 안팎에서는 이에 대한 지적이 지속 제기됐다. 고용노동부는 이 혼란을 의식해 지난 24일 시행령 개정안을 발표하고, 25일부터 입법예고에 들어갔다.
이번 개정안은 노동위원회가 원·하청, 또는 하청끼리 이해관계가 다르면 교섭단위를 나눌 수 있도록 교섭단위 분리제도를 확대한 게 골자다. 고용부는 이를 하청노조의 실질적 단체 교섭권을 보장하면서 교섭 체계 혼란을 줄이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하청노조를 묶고, 어디까지를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으로 볼지는 시행령에 구체화돼 있지 않다. 결국 원청은 통제할 수 없는 수십 개 교섭창구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원청 노조와 협상만 해도 해를 넘기는데, 이대로라면 1년 내내 교섭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 구조를 안다면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노동계도 "하청노조 권리가 약화된다"고 반발하고, 경영계는 "교섭만 하다 회사가 멈춘다"고 지적한다. 노사 모두 문제를 제기하는 정책은 드물다. 원청이 법적 리스크를 우려해 외주 비중을 줄인다면 협력사 구조조정과 지역경제 위축은 불가피하다. 원청노조와 하청노조의 교섭권 충돌까지 예고된다.
교섭권 보장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현실이다. 수천 개 협력사가 얽힌 산업에서 원청에게 사실상 불가능한 협상을 강제하는 것은, 학교 전체 학생을 한 명의 선생이 상담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책의 취지보다 중요한 것은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느냐다.
내년 3월 시행을 앞두고 산업현장은 이미 큰 변화를 예감하고 있다. 법이 현실을 모를 때 비용은 결국 기업과 노동자 모두가 떠안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좋은 의도'가 아니라 실제 가능한 제도 설계다.
[미디어펜=유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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