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는 안전에서 시작…책임 기준 명확해야
제도 격차가 기술 격차로…규제 역차별 개선돼야
[미디어펜=김연지 기자]최근 국내 도로에 미국산 자율주행 차량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테슬라는 FSD(완전자율주행) 서비스를 국내에 출시했고, GM 캐딜락 역시 슈퍼크루즈 기술을 적용한 신형 SUV를 선보였다.

9일 기준 국내에서 핸즈프리 주행이 가능한 차량은 테슬라 모델S·모델X, GM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IQ 등이다. 기술적으로는 기존 운전자 보조 시스템을 넘어섰지만,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은 모두 운전자에게 돌아간다. 제조사가 해당 기능을 미국 고속도로교통안전국(NHTSA)에 '레벨2'로 인증 받았기 때문이다.

   
레벨2는 운전자의 지속적인 전방 주시와 개입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외형상 완전자율주행처럼 보여도 법적 구조는 기존과 달라지지 않는다. 반면 레벨3부터는 시스템이 특정 상황에서 제어권을 갖기 때문에 제조사도 사고 책임을 일부 부담한다. 테슬라 FSD나 GM 슈퍼크루즈가 기능상 레벨3에 가깝다는 평가가 있음에도 레벨2로 인증된 이유는 기술 성숙도뿐 아니라 책임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제조사의 전략이 작동한 결과다.

실제로 테슬라 FSD는 목적지까지 대부분의 구간을 스스로 판단해 주행할 수 있고, 슈퍼크루즈 역시 고속도로에서 운전자 개입 없이 달릴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술로 사고가 나면 운전자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구조다. 기술 수준과 법적 책임이 따로 움직이는 셈이다.

이런 상황이 가능한 가장 큰 배경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다. 2012년 발효된 협정에 따르면 미국에서 안전 기준을 통과한 차량은 한국에서 별도 인증 없이 연간 5만 대까지 판매할 수 있다. 애초에는 자동차 교역 확대가 목적이었지만 현재는 첨단 자율주행 기능이 국내 기준이나 도로 환경 검증 없이 도입되는 통로가 되고 있다. 문제는 두 나라의 도로 여건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차선 폭, 교통 밀도, 도심 혼잡도, 운전 문화 등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은데도 국내 실증 없이 바로 주행이 허용된다. 안전 검증의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국내 기업에 대한 규제 부담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현대차·기아 역시 유사한 수준의 기술을 확보하고 있지만 이를 도로에서 시험하고 상용화하기까지의 절차는 미국산 차량과 전혀 다르다. 국토부 임시운행허가 취득, 제한된 실증 구역, 까다로운 보험·안전 요건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현대차그룹이 최근 '속도보다 안전' 전략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룹은 6년간 자율주행 계열사에 2조 원 이상을 투자했지만 아직 상용화하지 못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최근 행사에서 중국 기업과 테슬라와의 격차를 인정하면서도 "속도보다 중요한 건 안전"이라고 강조했다.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확대해 최신 AI 칩을 확보하고, 정밀 알고리즘 개발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술의 완성도와 안전성 검증을 최우선 가치로 두겠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외국 기업들이 국내 실도로에서 방대한 데이터를 축적하는 동안 국내 기업은 규제에 묶여 실증이 제한되면 경쟁력 격차는 더 벌어질 수 있다. 자율주행 경쟁력이 데이터 기반으로 이동하고 있는 만큼, 제도 차이가 산업 경쟁력 차이로 연결될 가능성도 크다.

정부 역시 이를 인식하고 최근 자율주행 산업 육성 방안을 발표했다. 2027년까지 레벨4 자율주행 상용화를 목표로 실증 공간 확대, 허가 절차 간소화, 데이터 활용 규제 완화 등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이다. 다만 이미 미국 기업들이 한국 도로에서 상용화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대책이 실효성을 얼마나 낼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자율주행차 시대에는 운전자가 아닌 시스템이 판단하는 순간이 늘어나기 때문에 사고 책임의 주체를 명확히 규정하는 법적 기준이 필수다. 주행 데이터 확보·공개, 독립적 검증 체계, 자율주행 인증 기준도 다시 설계해야 한다. 운전자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현재 구조로는 자율주행 시대를 감당하기 어렵다.

자율주행 시대는 기술의 시대이자 '책임의 시대'다. 책임과 안전을 받쳐줄 제도적 기반이 없다면 어떤 첨단 기술도 소비자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안전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기술 경쟁에 앞서 신뢰 가능한 규제 틀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자율주행 시대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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