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연지 기자]미국이 전기차 구매 보조금 폐지와 연비 규제 완화 등 전동화 속도 조절에 들어간 데 이어 EU(유럽연합)도 2035년 내연기관 신차 판매 전면 금지 방침을 수정하는 방안을 검토하면서 글로벌 완성차 업계의 전동화 로드맵에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전기차 중심의 시장 흐름이 둔화되는 가운데, 완성차 업체들은 시장 여건을 고려한 전략 조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16일 외신에 따르면 EU는 203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를 사실상 전면 금지하기로 한 기존 방침을 완화하는 방향의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일정 조건 하에서 내연기관 차량 생산을 일부 허용하는 내용을 담은 개정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현재 EU는 2035년부터 신차의 탄소 배출량을 100%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법제화한 상태다. 이 계획이 그대로 적용될 경우 내연기관차 판매는 전면 금지되고, 사실상 전기차만 허용된다. 그러나 EU가 발표할 개정안에는 일정 조건 하에 2021년 배출량 기준의 10%를 허용하는 방안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업체들이 제한된 물량의 휘발유·경유 차량을 계속 생산할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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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U 본부./사진=연합뉴스 제공 |
아울러 새 계획에는 자동차 생산 과정에서 친환경 철강 사용을 확대하는 조건이 포함될 가능성이 있으며, 2035년 이후 금지될 예정이던 전기차 내 주행거리 연장용 소형 엔진의 허용 여부도 검토 대상에 오른 것으로 전해졌다. 형식상 내연기관차 퇴출 기조는 유지하되, 산업 현실을 반영해 규제 적용 범위를 조정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전동화 전환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EU가 규제 완화에 나선 배경에는 유럽 완성차 산업의 수익성 악화와 제조업 전반의 부담이 자리하고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 등 자동차 제조업 비중이 높은 회원국들은 EU의 전동화 목표가 시장 수요와 산업 경쟁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왔다. 전기차 수요 둔화와 보조금 축소, 중국산 전기차의 가격 공세가 겹치며 유럽 제조업 전반의 부담이 커졌다는 평가다.
유럽 최대 완성차 업체인 폭스바겐의 독일 전기차 공장 폐쇄 결정은 이러한 위기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폭스바겐이 독일 내 공장을 폐쇄하는 것은 1937년 창사 이후 88년 만에 처음이다. 폐쇄가 결정된 드레스덴 공장은 전기차 ID.3를 생산해온 곳으로, 그룹 전동화 전략의 상징적 생산기지로 꼽힌다.
폭스바겐그룹은 올해 3분기(7~9월) 10억7000만 유로(약 1조9000억 원)의 세후 순손실을 기록하며 2020년 2분기 이후 처음으로 분기 적자에 빠졌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3% 증가했지만, 영업이익률은 같은 기간 3.6%에서 -1.6%로 급락했다. 그룹 측은 마진이 낮은 전기차 비중 확대와 미국 관세 부담, 계열사 포르쉐의 전략 수정에 따른 추가 비용을 실적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미국 역시 전동화 정책 기조를 빠르게 수정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전임 바이든 행정부 시절 강화됐던 자동차 연비 규제를 완화하며, 친환경차보다는 내연기관 차량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정책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전기차 구매 시 지급되던 7500달러(약 1102만 원) 규모의 세액 공제도 폐지됐다.
보조금 폐지 이후 전기차 수요는 급감하고 있다. 자동차 시장조사업체 콕스 오토모티브에 따르면 해당 조치 이후 10월 미국의 전기차 생산량은 전달 대비 약 49% 감소했다. 미국 대표 완성차 업체 포드는 195억 달러(약 28조6000억 원)의 비용을 감수하며 대형 전기차 생산을 중단하기로 했다. 외신은 전기차 세액 공제 폐지 이후 포드가 수익성이 높은 하이브리드와 내연기관 차량 중심으로 전략을 전면 수정했다고 전했다.
포드는 주력 모델인 F-150 라이트닝 등 대형 전기차 생산을 중단하는 대신 트럭과 밴, 저가 전기차,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 확대에 나설 방침이다. 포드의 내연기관 및 전기차 사업을 총괄하는 앤드루 프릭은 최근 전화 회의에서 "수익성 확보 가능성이 없는 대형 전기차에 수십억 달러를 투입하기보다, 수익성이 더 높은 영역에 자원을 배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정책 환경 변화에 완성차 업계 전반에서는 전기차 중심 전략을 재점검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순수 전기차 전환 속도를 조정하는 동시에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PHEV(플러그인하이브리드)를 병행하는 전략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전기차 대비 가격 경쟁력이 높고 수요가 안정적인 하이브리드 차량의 판매 기간이 늘어날 가능성이 커지면서, 완성차 업체들은 중장기 포트폴리오 전략 재정비에 나설 전망이다.
현대차·기아는 전기차 라인업 구축을 지속하면서도, 하이브리드와 PHEV 강화 전략을 병행한다는 방침이다. 현대차는 인스터 EV와 내년 출시 예정인 아이오닉3를 중심으로 소형 전기차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고, 기아는 EV3를 시작으로 EV2·EV4·EV5까지 전기차 풀라인업을 구축할 계획이다. 동시에 하이브리드 모델을 통해 유럽 시장의 수요 변화에도 대응한다는 전략이다.
업계 관계자는 "EU의 정책 변화는 글로벌 완성차 전동화 전략 전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제조사들은 전기차 중심 전략과 수익성 중심 전략 사이에서 보다 현실적인 균형점을 찾는 국면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한편 전기차 및 배터리 업계에서는 규제 완화 논의가 장기적인 투자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정책 방향이 불투명해질 경우 설비 투자와 연구개발 계획이 지연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디어펜=김연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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