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2일 인천공항. 한 푸른 눈의 노병(老兵)이 유골이 되어 한국을 찾았다. 왜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뒤로 하고 이역만리 한국에서 잠들려 하는가
전쟁이 갈라놓은 슬픈 형제의 운명, 세상 끝까지 함께하기로 한 형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푸른 눈의 노병, 유골이 되어 한국 땅을 밟다
지난 4월 22일 인천공항.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뒤로 하고 한 푸른 눈의 노병이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로 한국을 택했다. ‘아치 허시’. 캐나다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62년 만에 그는 한 줌의 유골로 한국 땅을 밟았다. 젊은 날,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곳, 그리고 사랑하는 형이 자신의 품에서 피를 흘리며 숨진 이곳에 형과 함께 잠들기 위해서다.
“평생 동안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어요.
전쟁 후 아버지는 자신의 일부를 형님과 함께 한국에 두고 오셨고
아버지는 항상 절대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을 갖고 사셨죠.”
-데비 허시(딸)-
형은 나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다
형 ‘조셉 허시’와 동생 ‘아치 허시’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작은 마을 이그나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21살 되던 해,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동생 아치는 자원 입대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향했다. 낯선 땅, 전쟁의 포화 속에 있을 동생이 걱정됐던 형 조셉 역시 다음해 자원입대했고 한국 땅을 밟았다. 같은 연대에 소속돼 있었지만 계속되는 전투는 형제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1951년 10월 13일. 북한과의 격렬한 교전 후 참호 경비에 나섰던 동생 아치는 캐나다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형이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형은 동생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그제야 동생은 형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참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의 주검은 부산UN기념공원에 안치됐고 아치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 후 60여년 동안 동생은 한번도 형의 무덤을 찾지 못했고 형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조셉허시 (형), 아치 허시 (동생)
가슴에 묻어둔 형, 평생을 함께 하다
동생 아치는 캐나다로 돌아와 가정을 꾸리고 외동딸 데비까지 두었지만 전쟁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꿈에서 형을 괴롭히는 적과 싸우기 위해 끊임없이 휘두른 주먹은 언제나 멍투성이었고 전쟁 영화를 보며 홀로 우는 날이 많았다. 처참했던 전쟁의 경험과 사랑하는 형의 죽음은 아치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안겨줬다. 외동딸 데비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
조셉 삼촌 때문에 할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많이 우셨어요.
현충일 퍼레이드에 늘 참석하셨고 아버지는 늘 우셨어요.
현충일은 아버지께 굉장히 고통스러운 날이었어요.
-데비 허시(딸)-
아마 조셉 형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자책한 것 같아요.
그래서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앓게 된 거죠.
-로널드 허시(동생)-
그리고 지난해 6월, 아치는 25년간의 폐질환 투병 끝에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유언은 한국에 있는 형 옆에 묻히고 싶다는 것이었다. 딸 데비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형제, 세상 끝까지 함께하다마침내 형제는 60여년 만에 한국 땅에 함께 묻혔다. KBS스페셜은 아치의 유골이 캐나다를 떠나 한국 UN묘지에 안장되기까지 전 과정을 취재하고 아버지 아치를 낮선 땅에 묻게 된 딸의 애절한 사부곡을 들어본다. 또, 한국전쟁 당시 형제의 발자취를 자료와 전우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하고 형제의 남다른 우애에 대해 짚어본다.
UN참전용사 재방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참전용사들, 딸 데비와 함께 치열했던 당시 전투현장을 돌아보고 허시 형제를 비롯해 많은 젊은이들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국으로 자원입대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이유와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함께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