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고정밀 지도' 국외 반출 조건부 허가
업계선 "공정 경쟁·산업 주권 위협" 우려 커
[미디어펜=배소현 기자] 정부가 구글이 요구하는 고정밀 지도 국외 반출을 조건부로 허가하기로 결정했다. AI(인공지능)와 자율주행 등 차세대 산업의 핵심 인프라로 꼽히는 공간정보 데이터가 국경을 넘게 되면서, 업계를 중심으로는 산업 종속과 안보 위협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분위기다.

   
▲ 사진=픽사베이 제공


27일 업계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이날 '측량성과 국외반출 협의체' 회의를 열고 구글의 1대 5000 지도 국외반출 신청 건을 심의한 결과 엄격한 보안 조건 준수를 전제로 반출 허가 결정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이는 구글이 정부에 고정밀 지도 반출을 요청한 지 약 20년 만의 결정이다.

학계와 업계, 시민단체 등은 이번 결정에 대해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산업 경쟁력까지 훼손할 것"이라며 비판에 나섰다.

한국공간정보산업협회, 대한공간정보학회 등 6개 유관 기관은 이날 공동 성명을 내고 "구글이 보완 신청한 내용에 대한 공론화 과정이 없었기에 이번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고정밀 지도가 자율주행·디지털 트윈 등 국가 핵심 인프라의 기반 데이터인 만큼 이번 반출이 국내 중소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산업 생태계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 "국내 기업만 규제 묶여"… 형평성 논란 확산

정부의 이번 허가 조건 가운데 하나는 구글의 국내 제휴사가 국내 서버에서 데이터를 가공하고, 정부의 검증을 거친 정보만 해외로 반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영상 보안처리 △좌표표시 제한 △국내 서버 활용 △사후 수정 △보안 사고 대응 △조건 이행 관리의 준수도 전제 조건으로 제시됐다.

정부는 이런 조건 충족 여부를 확인한 후 실제 데이터를 반출하고 지속적이고 심각한 조건 불이행 등의 경우에는 허가를 중단, 회수하도록 해 조건 이행을 철저히 관리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조건부 허가라는 이름 아래 실질적인 형평성은 여전히 깨졌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네이버·카카오·티맵 등 국내 업체들은 수년간 엄격한 보안심사와 데이터 처리 기준을 충실히 이행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과 기술 투자가 수반됐고, 이는 결과적으로 국내 산업 생태계 강화에 기여해 왔다. 하지만 이번 결정은 그간 국내 기업이 감내해 온 투자와 규제 준수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은 세금으로 마련된 인프라와 규제 비용까지 부담하며 경쟁력을 키워왔다"면서 "그런데 이번 결론은 결국 국내 기업만 규제에 묶이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지도 데이터는 국가가 직접 생산·관리한 공공 자산"이라며 "이번 결정은 공정 경쟁 환경을 해치는 결정"이라고 덧붙였다.

업계 일각에선 세금으로 구축된 고정밀 지도를 해외 기업에 조건부로 내줄 경우, 국내 지도 서비스뿐 아니라 자율주행·AI(인공지능) 등 신산업 전반에 필요한 데이터를 해외에 제공하는 셈이 돼 기술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정밀 지도 관련 데이터가 글로벌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활용된다면, 국내 산업의 자립 기반이 약화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 "10년 간 200조 원 피해"… 산업 생태계 종속 빨라진다

전문가들은 이번 결정이 국내 공간정보 산업의 경쟁 기반을 약화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산업 전반의 종속 구조를 고착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진도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는 최근 토론회를 통해 "고정밀 지도 반출이 허용될 경우, 향후 10년간 지도·모빌리티·건설 등 8개 산업 분야에서 약 150조~197조 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단순한 매출 감소를 넘어 AI·로봇·물류·도시계획 등 연관 산업 전반의 혁신 투자 여력을 약화시키는 구조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해외 플랫폼 의존이 심화될수록 국내 기업의 R&D 투자와 시장 진입 동력은 약화되고, 기술 자립 기반이 붕괴될 것"이라며 "지도 데이터가 외국계 생태계에 종속되면, 장기적으로 국내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진입 장벽이 높아지고 산업 전체의 혁신 속도도 둔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창훈 웨이버스 대표 역시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결국 구글 API를 쓸 수밖에 없게 된다"며 "최대한 이익을 위해서 노력을 하다가 결국은 플랫폼이나 다른 서비스를 포기하게 되지 않을까, 저희 스스로가 종속된 위치로 갈 수밖에 없는 흐름을 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 국가 안보·데이터 주권 논란… 반복되는 비판

국내 시민단체들은 정밀지도가 단순한 길 찾기 데이터가 아니라 자율주행, 디지털 트윈, 피지컬 AI 등 미래 산업의 핵심 인프라이자 전략 자산이라고 강조해 왔다. 반출이 허용되면 국가 안보와 데이터 주권에 대한 통제가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한 관계자는 "지도의 정밀도는 단순 지도 서비스를 넘어 군사·보안 인프라와 연결될 수 있다"며 "해외 기업에 해당 데이터를 내주게 되면 재가공·활용 과정에 대한 정부의 실시간 관리가 사실상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공간데이터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자율주행·디지털 트윈·스마트시티 등 관련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지도 데이터의 파급효과와 산업적 부가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전략 자산을 해외에 내주는 것은 단기적 편의보다 국가의 미래 성장 동력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결정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이번 결정이 단순히 산업 경쟁력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디지털 주권’을 어디까지 지킬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고정밀 지도는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이자 기술 주권의 기반"이라며 "이번 결정은 단순한 데이터 허가가 아니라 대한민국 디지털 주권의 시험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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