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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명 미디어그룹 '내일' 공동대표·미디어워치 온라인편집장 |
한겨레신문이 얼마 전 세상을 뜬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우상화에 미친듯이 매달리고 있다. 매일 같이 관련 기사를 내면서 그를 시대의 인물로 띄우고 있다. 다른 언론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비정상적인 미화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긴 마찬가지다.
다음카카오와 같은 포털도 한겨레의 신영복 기사를 메인에 올려놓기 바쁘다. 그를 잘 모를 대다수 일반 네티즌들은 포털이 띄운 한겨레의 기사를 보고 마치 자기 스승이 돌아가시기라도 한 것처럼 안타까워하는 댓글들을 달고 있다.
한겨레의 신영복 관련 기사들은 그야말로 미화 일색이다. “신영복 선생, ‘고교생들이 세운 소녀상’ 위해 투병중 손글씨 선물” “신영복 교수 영결식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흰눈 흩날린 날…1천명이 ‘더불어 함께’ 마지막길 배웅” “신영복 선생 마지막 유작은…경기도의회 ‘사람중심, 민생중심 의회’” “별의 동쪽, 신영복” “신영복 교수 녹취록 다시 보니…“청년시절만은 잃지 마라””
베스트셀러 대중작가로서 그의 별세를 아쉬워하는 여론이 있을 순 있다. 그러나 적어도 언론이라면 신영복이 어떤 인물인지 정도는 가감 없이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그 후에 신영복을 추앙을 하던 비난을 하던 대중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그런데 언론이 이런 기본적인 역할을 하지 않고 사실을 미화한다거나 혹은 감춘다면, 분명 의도가 있는 것이다.
미화를 넘어 우상화 일색으로 신영복 열풍을 만드는데 집요하게 매달리는 한겨레의 기사들은 단순 추모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목적이 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신영복 그가 과연 이 시대의 스승처럼 성인처럼 그려져도 괜찮은 인물인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의 헌법질서를 가진 민주국가가 아니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신영복은 이런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폭력 혁명으로 뒤집어엎으려던 반역행위로 20년을 복역하고, 거짓 전향서를 쓰고 풀려나온 뒤에도 죽을 때까지 붉은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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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신문이 1월 23일자 토요판 커버스토리로 다룬 ‘신영복, 그는 본디 붉은 경제학자였다’에서 한겨레 토요판 2012년 1월28일치에 실린 ‘신영복의 그림사색’을 소개하고 있다. 신영복은은 그해 5월19일치까지 이 칼럼을 연재했다. |
신영복이 꿈꾼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그가 쓴 전향서가 거짓이었다는 건, 수감에서 풀려나온 후 그의 언행과 주변인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분명하다. 신영복이 어떤 인물인지는 그를 포섭하고 가르쳤던 통일혁명당 사형수 김질락이 남긴 옥중수기에 잘 나와 있다. 자신이 포섭한 신영복에 대해 교육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마르크스주의로 사상무장이 완벽히 돼 있음을 설명했다.
사후 그를 우상화하는 정신 나간 언론들의 찬양이 심각한 수준으로 흐르는 걸 보다 못한 그의 서울상대 대학후배는 모 매체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증언했다. “거짓 전향한 인사로 '붉은색 전사'들을 키워내 온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신영복이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마지막장에 언급된 ‘석과불식’을 두고 신씨가 "석과는 가을에 나뭇가지 끝에 하나 남겨 둔 '씨 과일'로 씨가 새싹으로 돋고 또 나무가 되고 또 숲이 되는 것처럼 석과불식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고 한 대목을 두고 그 후배는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신영복 자신이 ‘석과불식’에 대해 자신이 전향서를 쓰고 감형을 받고 살아남은 이유와 경위, 정당성을 변명한 내용인데, 실은 “인고의 세월동안 많은 붉은 색의 전사를 키워내기 위했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신영복에 대해 이런 증언을 한 대학 후배는 불과 수년전까지 그와 친밀히 교류하다가 어느 순간 그가 변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절교를 했다고 한다. 신영복이 말했던 ‘더불어 함께’에 담긴 본뜻이 과연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한 더불어 함께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옥중수기에는 신영복이 김질락에게 이런 말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래서 무척 조심했습니다. 다 걸리지 않게 쓰는 방법이 있지요. 외견상으로 볼 때 누가 봐도 저는 순수한 자유주의자죠.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될 수 있는 대로 쉽고 재미나는 말로 계급의식을 주입시키지요....” 이렇게 위험하지 않고 안전하게 학생들에 사상교육을 했던 신영복에게 대중을 현혹하는 글재주, 말재주가 있었음을 볼 때 그가 말하는 ‘사람을 키우는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더 더욱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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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신문이 얼마 전 세상을 뜬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우상화에 미친듯이 매달리고 있다. 매일 같이 관련 기사를 내면서 그를 시대의 인물로 띄우고 있다. 다음카카오와 같은 포털도 한겨레의 신영복 기사를 메인에 올려놓기 바쁘다. /사진=연합뉴스 |
신영복으로 대한민국 체제에 도발한 한겨레의 정체성
신영복에 대해선 복잡할 게 하나도 없다. 명백한 사실은 그가 전향서를 쓰긴 썼으되, 언행을 통해 단 한 번도 전향을 증명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대중의 인기를 얻은 인물이라 다룰 수 있을지는 몰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추앙하고 존경하고 따를 스승처럼 언론이 미화할 인물은 결코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은 역사가 증명한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도 붉은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시대착오 몽상가를 향해 미친듯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심지어는 대놓고 “신영복, 그는 본디 붉은 경제학자였다”며 그의 정체성을 대담하게 까발리며 ‘빨가면 좀 어떠냐’는 식으로 나온다. 이쯤 되면 한겨레의 신영복 우상화가 노리는 목적이 무엇인지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발이자 조롱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한겨레는 대한민국 헌법이 우스운가.
한겨레는 헌재가 통합진보당을 해산 시켰을 때도 “관용과 다원성을 핵심 가치로 하는 민주주의는 이로써 송두리째 부인됐다”며 비난한 전력이 있다.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종북정당을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해산시킨 것을 관용, 다원성 운운하며 헌재를 비난했다. 대한민국의 헌법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 자신들이 우기는 주장이 헌법정신이라며 거만하게 헌재에 호통을 치고 몰아세웠다.
자신들이 마치 헌재 위의 또 다른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이런 언론을(엄밀히 말해 언론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종북지라고 부를 수 없다면 국민은 달리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종북까지 품어야 민주주의이며 그게 관용이고 다원성이라는 논리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가능한 이야기인가. 북한과 남한의 간첩, 종북주의자들이나 박수치고 좋아할 얘기 아닌가. 그런 한겨레가 신영복의 정체성과 본질은 교활하게 가려가며 마치 이 시대의 양심적 지식인, 참된 영웅처럼 우상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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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사 메인페이지 우측에 ‘신영복교수의 책과 글’ 코너를 마련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한겨레다. 사진은 17일 성공회대 피츠버그홀에서 열린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 추모의 밤’ 행사./사진=연합뉴스 |
노골적 정체성 드러낸 한겨레는 자유민주주의의 적
한겨레신문의 토요판 기사 ‘신영복, 그는 본디 붉은 경제학자였다’는 통진당을 해산시킨 헌재에 맹렬히 삿대질을 하고도 멀쩡한 한겨레의 자신감이 빚은 헛발질이다. 이젠 국가반역행위를 아니라고 옹호하는 수준을 넘어 ‘빨갱이면 어떠냐’는 식으로 대놓고 우상화한 기사다. 보통 자신감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기사다.
더 심각한 것은 정부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언론계 어느 한 곳도 한겨레의 이런 미친 우상화 작업 행위에 찍소리도 못하고 있다. 한겨레로 대표되는 좌파권력이 이 나라를 어느 수준으로까지 잠식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겨레가 입만 열면 떠드는 언론자유는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뒤엎을 자유를 허락한 게 아니다.
언론 자유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가늠도 못하고 평생 붉은 혁명을 꿈꿨던 몽상가를 의식적으로 우상화하는 언론이라면 존재 가치가 없다. 아니 그런 언론은 반드시 없애야 할 자유의 적이다. 한겨레는 자신들이 지금 어느 선에 발을 딛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박한명 미디어그룹 '내일' 대표·미디어워치 온라인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