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파나마 페이퍼스의 경고②]지하경제 양성화 무색, 꽁꽁 숨는 현금
[미디어펜=이원우 기자]발단은 TV토론이었다. 

2012년 12월 10일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는 2차 TV토론에 출연해 '지하경제 활성화'를 언급했다. '활성화'가 맞는지 '양성화'가 맞는지를 놓고 SNS에서는 열띤 공방이 오갔지만 지하경제 양성화를 세수 증대 방안으로 언급한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은 취임 이후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새 정부 출범 직후 국세청은 각 지방 조사국에 세무조사 전문 인력 400여명을 증원하는 인력 재배치를 단행했다. '지하경제 양성화 추진 기획단'도 발족했다. 

   
▲ 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 의지에도 불구하고 모든 현금거래를 의심하는 분위기에 이르자 더 깊숙한 지하경제로 숨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연합뉴스

안종석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박근혜 정부의 지하경제 정책에 대해 "대기업, 대재산가, 고소득 자영업자 등의 탈세와 탈루를 적발해 걷혀야 할 세금을 제대로 걷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고 분석했다. 그렇게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세금을 걷으려는 정부와 세금을 피하려는 탈세자들의 술래잡기는 마치 2003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You Can)'처럼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는 사기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변신 과정 속에 있었다. 기자에서 비행기 조종사, 정부 비밀요원으로 끊임없이 외양을 바꿔가면서 프랭크는 자신을 쫓는 칼(톰 행크스)의 레이더망을 교묘하게 피해갔다.

프랭크의 모습은 마치 지하경제를 일망타진하기 위한 국세청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하는 탈세범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탈세의 기술 역시 끊임없는 변신을 거듭하며 국세청과 쫓고 쫓기는 두뇌게임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실패한 것처럼 보여라! '모자 바꿔 쓰기'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 그렇다면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는 소득을 줄이거나 적어도 적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모든 탈세범들의 기본적인 목표다.

이 과정에서 흔히 등장하는 수법이 바로 '모자 바꿔 쓰기'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외형(모자)만 바꿔가면서 세금을 피하는 것이다. 재산이 없는 종업원을 이른바 '바지 사장'으로 내세워 사업자등록을 한 뒤 의도적으로 세금을 체납, 폐업신고를 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피해가는 게 모자 바꿔 쓰기의 대표적인 방식이다.

종업원을 바꿔가며 같은 방식으로 영업을 지속하면 세금을 피한 상태로 영업이 가능해진다. 특히 유흥업계나 귀금속업계에서 횡행하던 수법이며 심지어 노숙자가 '섭외'되는 경우도 있었다.

2007년 모자 바꿔 쓰기 수법으로 탈세한 업체를 국세청이 대거 적발한 것을 계기로 재정경제부는 '2007년 세제개편안'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과세유흥업이나 귀금속사업자의 경우 사업자등록을 할 때 자금출처소명서의 제출이 의무화됐다. 자금의 원천을 최대한 상세히 밝히도록 함으로써 세금 탈루의도를 원천봉쇄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2008년 7월 1일자로 제도가 시행된 이후 8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모자 바꿔 쓰기는 횡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시대적인 변화도 한몫을 하고 있는데, 유흥업과 귀금속업 만큼이나 세부적인 추적이 힘든 '쇼핑몰 사업'이 이 수법의 주된 업종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2013년 발표된 국세청의 자료에 따르면 유명 온라인쇼핑몰을 운영하던 A씨는 종업원을 간이과세자로 등록시킨 뒤 폐업과 등록을 반복하는 모자 바꿔 쓰기를 시도하다 과세당국에 적발됐다. 수입금액 28억 원을 종업원 명의 100여 개의 차명계좌에 입금하며 수입신고도 누락해 총 탈루소득 59억 원에 대해 부가가치세 등 20억 원을 추징당했다.

국세청은 2012년 4월부터 전자상거래를 전담하는 첨단탈세방지담당관실을 신설했고 인터넷쇼핑몰과 도박 사이트 등 전자상거래와 관련된 탈세 조사에서 총 893억 원을 추징했다.

명의위장사업자를 신고하는 사람에게 포상금을 지급하는 제도 또한 시행 중이다. 탈세자 입장에선 '모자를 바꿔 쓸' 여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셈이지만 국세청의 조치가 또 다른 방식의 패턴을 파생시킬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당국의 관심은 오히려 시들해진 느낌이다. 한국금융연구원 김자봉 박사는 지하경제에 대해 "데이터로 수치화해서 표현하는 것 자체가 힘든 영역"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곧 당국의 의지나 적극성에 따라 지하경제의 크기나 활성화 정도가 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다른 조세전문가는 "국세청으로서는 세무조사를 강화하겠다고 밝히는 것도 경제 상황을 고려해서 유예하겠다고 하는 것도 논란의 여지를 낳을 수 있다"며 "정해진 법에 따라 원칙적으로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국민들의 신뢰를 위해서도 국가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세금을 '성형'하는 성형외과

지하경제의 아이러니한 점은 '지상경제'의 부흥과 함께 지하경제도 활성화 되는 경향을 띤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관광 분야다. 최근 한국은 '연간 1000만 관광객 시대'를 준비할 정도로 관광 사업에 기대를 걸고 있는데, 이와 함께 관광을 빌미로 한 지하경제도 '동반성장'을 하고 있다.

특히 탈세의 주요한 온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곳은 성형외과다. 특히 최근 급증한 '성형 관광객'들의 경우 현금을 사용하는 비중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다. 내국인의 경우에도 신분노출을 우려해 카드 대신 현금을 사용하는 경우가 잦아 탈세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현금을 창고에 쌓아두는 방식은 탈세수법으로서는 상당히 구식에 속하지만 B성형외과의 경우 지난 2012년 내‧외국인에게서 거둔 수익 114억 원을 따로 임대한 비밀창고에 쌓아두었다가 국세청에 적발됐다. 이들은 이 금액 중에서 69억 원을 세금으로 추징당했고 사법당국에도 고발을 당했다. 

작년에는 서울 강남구에 위치하면서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는 C성형외과가 상습적으로 수익금을 납세하지 않아 1000억 원 이상의 탈세가 예상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대한성형외과의사회가 자체조사를 벌이며 정화작업에 나서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현금만이 아니라 자료를 따로 보관하는 수법 역시 탈세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다. 여성 전문치료를 하는 D병원 원장의 경우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고액진료 기록을 병원 컴퓨터에서는 삭제하고 별도의 자료를 만들어 개인 오피스텔에 보관했다. 물론 진료비는 현금으로 수납하면서 카드나 현금영수증 발행 수입만 신고하는 방식으로 45억 원을 탈루했다. 결국 D원장은 이 중에서 19억 원을 추징당했고 고발조치 됐다.

지하경제 양성화 방침과 함께 국세청은 탈세 혐의가 있는 부유층과 인터넷 카페, 불법 사채업자 등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에 수차례 돌입했다. 동원되는 인원만 약 1000명에 달할 정도로 강도 높은 조치가 이어졌다. 이는 고소득자 자영업자와 대재산가들, 역외 탈세자들이 구축한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방침에 부응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비상한 관심을 자아냈다.

물론 부자들에 대한 세무조사라는 전가의 보도를 꺼내든 국세청에 대해서 우려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지하경제는 그 속성상 위에서 양성화를 시도하면 더욱 밑으로 침잠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 경제전문가는 "현 정부가 대규모 탈세 수사를 수차례 벌이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반면 검은 돈들이 더 깊은 지하로 숨어든 정황도 없지 않다"면서 "탈세를 잡아내려는 적발의지가 지나칠 경우 모든 현금거래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경제활동이 위축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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