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금리 인하‧발권력 동원 "5년 뒤 보면 알 것"
[미디어펜=이원우 기자]"지난해 창립 기념행사 때, 내년에는 우리 경제가 나아지길 바랐는데 우리 경제 현실은 추가로 기준금리를 인하할 만큼 어려움에 처해있습니다."

한국은행 이주열 총재가 지난 10일 한은 창립 66주년 기념행사에서 한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하루빨리 우리 경제가 활력을 찾기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국책은행 자본확충 펀드에 참여한다"고 덧붙였다. 어려워진 경제 상황 속에서 한은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고심의 흔적이 묻어나는 기념사였다.

여기에 파격적 기준금리 인하까지 한국은행은 소년 가장의 살림살이를 꾸리듯 의기소침한 한국 경제 살리기에 모든 것을 희생한 모습을 보였다.

   
▲ 한국은행 홈페이지 이미지 캡쳐.


한국은행은 6월 12일로 창립 66년을 맞는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이다. 인간의 일생에 가까운  시간동안 한은은 우리 경제의 선두에 홀로 서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소년소녀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50년 6월 12일, 초대 구용서 총재 체제로 돛을 올린 한국은행의 효시는 일제 강점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09년 11월 옛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처음으로 중앙은행제도가 도입된 이래 한일합방 이후인 1911년 8월 '조선은행'으로 개편됐던 것. 

우리 정부가 주도하는 중앙은행의 설립이 다시 추진된 것은 해방 후였다. 그리고 1950년 미국 뉴욕연방은행 블룸필드 국장이 만든 법안을 기초로 한국은행법이 공포됐다. 당시 한은이 표명한 창립 목표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한 통화가치의 안정과 은행신용제도의 건전화 및 국가자원의 유효한 이용도모'였다.

하지만 한은의 앞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장 출범 2주 뒤 한반도는 6‧25 전쟁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한은은 전쟁 중에는 전비 조달과 전시 인플레이션 수습에 나서야만 했다. 

이후 1960년대에는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돼 한국은행은 개발자금 조달에 매진했다. 그리고 70년대에는 성장에 따른 인플레 수습, 80년대에는 급속도로 팽창한 외채 관리, 90년대에는 금리자유화 추진과 인플레 수습에 몰두하며 한국경제를 떠받쳐 왔다.

창립 이후 지금까지 계속 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한은의 '지위' 문제다. 설립될 때만 해도 독립적인 지위를 누렸던 한은은 5‧16 이후 정부의 영향권 아래 놓였다. 1995년 한국은행법 개정으로 확실한 독립기관이 됐지만 1997년까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은 재무부 장관이 맡았다. 

현재에도 ‘기업 구조조정’이라는 어려운 목표 앞에서 정부와 한은 사이에는 때때로 긴장감이 흐르기도 한다. 임기 내에 구조조정을 마무리 하려는 정부와 시장경제의 원칙을 지키면서 '경제발전'이라는 본분에 충실해야 하는 한은의 이해관계는 '같지만 또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구조조정을 위한 '실탄' 공급을 위해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이 적합한가의 문제다. 논란 끝에 결국 한국은행이 10조, 기업은행이 1조를 산업은행에 대출해 준다는 계획이 지난 8일 발표됐다. 

정부의 '큰 그림'에 한은이 동참하는 구조가 완성된 셈이지만 발권력을 동원해 10조를 대출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논란도 뜨거운 상황이다.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김성진 변호사는 같은 날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담보를 안 받고 돈을 내주는 것은 한국은행법에 없으므로 법 위반이 아닌지 강한 의심이 든다"고 비판했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책은행 자본확충에 발권력을 지원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주열 총재는 '국민적 기대'를 이유로 언급했다. 지난 10일 창립 66주년 행사에서 이 총재는 "우리 경제가 하루 빨리 활력을 되찾는데 한은이 더 많은 힘을 써달라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기준금리 인하와 국책은행 자본확충 참여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날 자리에 참석한 이성태 전 총재는 한은의 자본확충펀드 참여에 대해 "평가를 사양한다"며 "5년 뒤 보면 알 것"이라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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