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원우 기자]취임 4개월 만에 최악의 위기를 맞은 산업은행 수장의 표정은 참담했다. 금융권에서 40년 넘게 경력을 쌓은 이동걸 회장이지만 이날 그는 "국민 여러분께 드린 실망을 생각하면 머리를 들 수 없을 정도"라며 고개를 낮게 숙였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산업은행 62년 역사에 '위기'가 찾아왔음을 절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7층 대회의실에서는 이동걸 회장 주재로 '혁신추진방안 기자간담회'가 개최됐다. 구조조정 역량 제고‧출자회사 관리 강화‧성과중심 인사관리체계 도입 등 6대 혁신과제 발표에 포커스가 집중됐지만 뜻밖에 개최된 이날 간담회의 본래 목적은 '사죄'였다는 게 금융권의 중론이다.
하지만 이날 간담회에서는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이동걸 회장의 '속내'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현재까지 드러난 잘못에 대해 여론의 거센 질타가 쏟아지는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해도, 아직 남아 있는 구조조정 과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그저 침묵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고 판단한 눈치다.
|
 |
|
▲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7층 대회의실에서는 이동걸 회장(사진) 주재로 '혁신추진방안 기자간담회'가 개최됐다. /연합뉴스 |
이날 검찰은 산업은행 부행장 출신으로 대우조선해양 CFO에 파견됐던 김모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씨가 CFO로 재직한 2012~2015년간 대우조선은 5조원 규모의 분식회계를 자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산업은행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여론이 우세하다. 류희경 부행장의 경우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의 미공개 정보이용 관련 사안으로 지난달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맡은 바 '책무'가 무거운 만큼 '책임'질 일도 많은 산업은행이다.
취임 직후였던 2월 18일 이후 4개월 만에 개최된 이날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이동걸 회장은 "4개월이 4년처럼 느껴진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40년 금융인생에서 가장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표현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조선업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국민 여러분께 오히려 걱정을 끼쳐드리고 언론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있다"면서 "돌이켜 보면 경기 사이클과 산업 전반을 보는 거시적 안목이 부족했다"며 연신 자세를 낮췄다. 이후 논점은 '6대 혁신과제'로 넘어갔다.
이날 산은은 ▲구조조정 역량 제고 ▲중장기 정책금융 비전 추진 ▲출자회사 관리 강화 ▲여신심사‧자산포트폴리오 개선 ▲성과중심의 인사‧조직 제도 개선 ▲대외소통‧변화관리 강화 등의 6대 혁신과제를 내놨다.
구조조정 역량을 높이기 위해 회장 직속으로 '기업구조조정 지원 특별자문단'을 구성한다는 내용도 눈길을 끌었다. 자문단은 산업별‧학계‧회계‧법률 등 전문가 40∼50명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이밖에 성과주의 도입, 2021년까지 현재 정원의 10%에 대한 단계적 축소 계획 등을 밝혔다. 조직의 규모를 슬림화(化)해 속도감 있는 구조조정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계획 발표 이후에는 수십 개가 넘는 기자들의 질문에 전부 답변했다. 출자회사관리위원회의 투명성 제고방안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이 회장은 최익종 출자회사관리위원장의 이름을 거론하며 신뢰감을 드러냈다. 'KDB혁신위원회 구성이 또 다른 낙하산 논란으로 번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공직자윤리법에 준하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합병 가능성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이 회장은 "너무 앞서간 부분이라 말씀드리기 어렵다"면서 "한진해운 등 현재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기업들에 대해서는 '지원이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나갈 것"이라고 의지를 드러냈다. 행여 원칙에서 벗어난 지원이 진행될 경우 향후 다른 기업의 구조조정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
|
▲ 연합뉴스 |
한편 질의응답과 마무리 발언에서 이동걸 회장은 모두발언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속내'를 꺼냈다. 이 회장은 "산은의 오랜 역사 가운데 구조조정 통해 성공적으로 구조조정 된 무수히 많은 사례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잘된) 부분은 세월이 흐르면서 잊힌다"고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마무리 발언에서도 이 회장의 '의지'는 드러났다. 그는 "어디를 가도 저희(산업은행)는 우군이 없는 상태"라고 토로하면서 "현대상선 등 협상 마무리 단계에서 언론에 말하지 못한 여러 가지 노력들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이 말은 이번 협상과정에서 런던에서 온 선주 측이 한국 언론을 집중 모니터링 해 협상에 활용했던 점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산은이 언론에 너무 많은 정보를 공개할 수 없었던 속사정이 있음을 암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우조선해양과 한진해운 문제에 대해서도 이 회장은 "앞으로도 우리(산은)가 다소 매를 맞더라도 결론적인 관점에서 국익에 도움이 되는 길을 택해야만 하는 고충을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며 여운을 남겼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