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없이 '뭇매' 때려 놓고 이제와 지원 요청?
[미디어펜=이원우 기자]은행권에 '변양호의 저주'가 확산되고 있다. 취약업계 구조조정에 더 많은 '총알'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주요 은행들이 추가지원에 난색을 표명하고 있는 것. 보신주의 확산을 의미하는 '변양호 신드롬'이 고착됐다는 지적이다. 산업은행‧수출입은행을 포함한 국책은행은 물론 민간 은행까지 소극적으로 변했기는 마찬가지다.

27일 금융권과 조선업계에 따르면, 조선업을 비롯한 취약 업종에 대한 지원에 은행들이 일제히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의 소난골 프로젝트 관련 이슈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 조선업을 비롯한 취약 업종에 대한 지원에 은행들이 일제히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의 소난골 프로젝트 관련 이슈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미디어펜


앙골라의 국영석유회사 소난골은 지난 2013년 12억 달러(한화 1조 4000억 원 규모)의 드릴십 2척을 대우조선에 발주했다. 7월에 인도가 끝나면 이 돈을 받는다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소난골에 3억 7000만 달러의 보증을 약속했던 노르웨이 수출보증공사 보증을 철회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인도자금이 연내 들어오지 않으면 대우조선은 법정관리로 갈 수도 있는 상황. 정성립 대우조선해양 사장은 진작부터 '전사적 대응'을 강조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금융당국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보증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문제는 요청을 받은 이들 국책은행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점이다. '국제유가 하락으로 소난골 경영 상황에 우려스러운 면이 있다'며 보증 결정을 고민 중이라는 게 표면적인 입장이지만 속내는 훨씬 복잡하다는 분석이다.

이미 두 국책은행은 대우조선해양 문제와 관련돼 혹독한 '대가'를 치른바 있다. 특히 작년 10월 대우조선에 4조 2000억 원을 추가 투입한 것에 대해 정치권과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검찰이 분식회계 등 경영 비리까지 파헤치면서 국책은행 책임론은 속절없이 확산됐다. 

구조조정과 관련된 질타가 전 방위적으로 쏟아진 이후 이들 국책은행 내부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지난달 23일 대국민 사죄 기자회견을 연 자리에서 "세상을 잃으면 다시 모으면 되지만 용기를 잃으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못한 일"이라는 괴테의 말까지 인용하며 읍소에 가까운 입장을 표명했다. 

산은-수은의 신경전마저 감지되고 있다. 두 은행은 금융권의 조선‧해운업 여신 가운데 70%를 떠안고 있어 이들 없이 성공적인 구조조정은 사실상 어렵다. 합심해서 나서도 해결이 쉽지 않은 판국에 이들 국책은행이 더 이상 리스크를 짊어질 용기마저 잃어버렸다는 지적이다.

국책은행 한 관계자는 "우려하던 변양호 신드롬이 현실로 다가왔다"며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욕먹으면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변양호 신드롬이란 2003년 외환은행의 론스타 매각을 주도했던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헐값매각 시비에 휘말려 구속된 사건을 빗댄 말이다. 논쟁적 사안이나 책임감이 요구되는 결정에 더 이상 공무원들이 나서지 않으려 하는 보신주의를 지칭한다.

문제는 이와 같은 보신주의가 민간 은행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중공업에 대한 여신 만기연장 사례가 대표적이다. 금융당국이 만기를 연장해달라고 직접 요청하기까지 했는데도 국민은행을 비롯한 은행들은 1년 만기 연장 대신 '3개월 만기 연장'이라는 소극적 카드를 택했다.

현대중공업에 대한 선수금 환급보증(RG) 발급 문제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지난 13일 현대중공업 주채권은행인 KEB하나은행이 직접 나서서 현대중공업에 대한 RG 발급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시중 은행들은 전부 난색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업 대출 잔액을 보면 민간 은행들의 리스크 회피 성향은 한눈에 드러난다. 당국 자료에 따르면 신한‧국민‧KEB하나‧우리‧농협 등 5대 은행의 대기업 대출 잔액은 지난해 말 91조 4174억 원에서 지난 6월 말 85조 8588억 원으로 줄어들었다. 한 달에 1조원 꼴로 대출잔액이 줄어든 셈이다.

금융당국이 '대기업 여신감소 자제'를 요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흐름은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모든 것을 '결과' 중심으로 판단하는 당국의 관치금융 행태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지적이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금융기관이 얼마나 고생을 했든 '결과'가 나쁘면 대우조선 케이스와 똑같은 일이 얼마든지 또 발생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한 마디로 정부가 요구하는 기업 구조조정과 민간 금융기업의 '생존'이라는 가치가 부딪치고 있는 형국이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은행들도 각자 저금리로 인한 수익성 악화로 다들 근근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 기업 구조조정에까지 적극적으로 나서긴 쉽지가 않다"면서 "당분간은 서로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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