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특임교수로 프리덤팩토리 대표이사를 역임한 김정호 교수가 최근 신간을 냈다. 제목은 '대한민국 기업의 탄생'. 책 속에는 백제 건축명장 유중광에서부터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회장까지 기업가 정신을 가지고 삶을 개척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한때 찬란했던 기업들의 역사가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모습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결코 망할 것 같지 않았던 기업이 망하기도 하고, 또 별로 성공하지 못할 것 같았던 회사가 최고의 지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 나라의 경제가 성숙해 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번영의 역사 또한 기업들이 이룩한 흥망성쇠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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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진해운 사태를 원칙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한진해운이 우리 경제에 주었던 효용보다 훨씬 막대할 것이다. 대마불사의 신화보다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현실을 직시할 때다. /한진해운 |
일련의 상황은 생태계의 생리와도 비슷하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표범에게 잡아먹히는 멧돼지의 모습을 보면 본능적으로 생명을 구걸하는 그 모습에 비참할 정도로 가슴이 아파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표범더러 사냥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더욱 심각한 형태의 생태계 교란이 파생될 뿐임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이 기업 생태계에서는 자주 흔들린다. 한국 사회는 최근 한진해운이라는 거대기업이 '법정관리'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충격에 빠졌다. 절대 망할 것 같지 않았던 거대 제국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서글픈 심상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누구라도 똑같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이미 회생의 기회를 놓쳐버린 기업의 생명에 억지로 산소 호흡기를 달아줘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표범의 사냥을 막아선 안 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원리지만 한국 사회는 좀처럼 '대마불사'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진해운에 대해 거의 모든 언론이 맹목적인 수준으로 '회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실은 크게 다양한 문제점을 파생시킨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건 어쩔 수 없이 구조조정을 주도해야 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지나치게 꺾어놓는다는 점이다.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의 확산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가 비유하기를 "구조조정은 호랑이나 사자의 멋진 사냥보다는 하이에나의 활동과 오히려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미 쓰러져 죽음이 임박한 기업에서 최대한 활용 가능한 뭔가를 찾아내고 자원을 재배치해야 한다는 측면을 고려해 주면 얼추 맞는 비유 같다. 우리 중 누구도 하이에나를 멋지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이에나가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없는 건 아니다.
현 시점에서는 산업은행이 대표적으로 '변양호 신드롬'의 위기에 내몰린 상태다. 한진해운이 내놓은 자구안을 산은이 거부하면서 '물류대란'이 우려되는 점에 대해 모든 비난을 산업은행이 뒤집어쓰고 있다. 산은의 활동이 결코 완벽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그 누구도 구조조정이라는 '궃은 일'에는 나서지 않을 것이다.
지난 9일 개최된 조선‧해운산업 구조조정 청문회에 출석한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중요한 한 마디를 했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 신청 9일 전까지 화주들에게 "자구안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드러나자 "한진해운이 '대마불사'를 믿고 물류대란 대비에 소홀했던 것 같다"고 코멘트한 것이다.
한진해운의 법정관리가 현실이 된 이후 비판의 화살이 한진보다는 산은 등 정부‧채권단에 쏠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대마불사'의 신화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대마불사는 없다. 아무리 큰 말이라 해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진해운 사태를 원칙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한진해운이 우리 경제에 주었던 효용보다 훨씬 막대할 것이다. 대마불사의 신화보다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현실을 직시할 때다.[미디어펜=이원우 기자]
[미디어펜=이원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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