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없는 정의는 한낱 조롱거리일 뿐이다
현재 동북아 정세는 북핵이 점차 실험적 성격이 아닌 살상 병기로의 전환이 임박했음에 위기감이 그 어느 때보다 팽배하다. 이러한 시국에 한겨레신문의 사설을 보며 문득 중국의 송 왕조 시기 거란족의 나라 요와 체결한 화친조약, 이른바 '전연의 맹’이 떠오른다.
전연의 맹은 1004년, 송과 요가 형제 관계를 약속한 조약이다. 조약에 의해 송은 요에게 매년 비단 20만 필, 은(銀) 10만 냥의 세폐를 보냈다. 그럼에도 요는 송을 침략하여 베이징 인근 연운 16주를 점령한다. 송은 요에게 평화의 탈을 쓴 '굴종’을 약속한 것이었다.
송은 또 다른 북방 민족이 세운 서하와도 비슷한 조약을 맺어 막대한 국부유출이 시작됐고 민생의 피폐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처럼 100여 년간 거짓된 평화가 지속되며 송의 문치주의와 고위층의 안이함은 커져만 갔다. 고위층의 나태로 인한 개혁의 실패, 막대한 세폐 지불로 한계를 드러낸 송은 수도 카이펑마저 새로운 북방의 패자(覇者) 여진족에게 빼앗겼다. 이 사건을 역사는 '정강의 변’이라 한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사드 배치를 결정했고, 북핵에 대한 강경 대응을 천명했다. 한겨레 사설은 이를 비난하며 공세의 강도를 높였다. 비난의 핵심은 사드가 중국의 심기를 자극할 뿐만 아니라 공안정국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즉 금전적 지원으로 북한과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 대북 정책을 답습하자고 주장한다. 핵병기가 우리의 눈앞에 왔음에도 순수(?)하기만 한 한겨레의 주장은 실로 '전연의 맹’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대북 송금과 지원은 김씨 왕조 독재자의 손아귀에 핵을 쥐어주는 마중물이 되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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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상식적인 국가가 아니다. 개인소유의 가산(家産) 국가다. 정치권력에 그 어떠한 책임도 물을 수 없고 증명할 수 있는 정당성도 없다./사진=연합뉴스 |
<기사개요>
● 매체: 한겨레
● 기사명: [사설] 북한 규탄과 야당 성토밖에 모르는 '안보 무능’
● 등록일자: 2016년 09월 11일
정부의 대북 정책을 비판하기 이전에 한겨레 사설의 글쓴이는 알아야 한다. 현재 북핵 문제가 심각해진 원인 중 하나가 바로 '햇볕정책’이라는 것을. 평화를 견지해야하는 원칙상 정부는 중국과도 외교적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한반도 비핵화에 접근하려 했지만, 중국 관료들의 발언은 끝까지 북한을 보호하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근본적 원인을 인지하지 못한 핵 문제 접근은 어느 쪽으로 해결하려 해도 풀리지 않는 자물쇠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겨레 사설은 대통령의 발언을 꼬투리 잡아 고장 난 축음기처럼 비난 세례만을 반복했다. 정부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사태가 왜 이 지경이 됐는지 그 역사와 사실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것인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북한은 상식적인 국가가 아니다. 개인소유의 가산(家産) 국가다. 정치권력에 그 어떠한 책임도 물을 수 없고 증명할 수 있는 정당성도 없다. 아직도 동포요 한민족이라고 생각하는가? 대화와 타협이라는 보기 좋은 수단으로 풀 수 있는 그런 단순한 관계라고 생각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송과 요의 관계처럼 북한에 지원을 재개하고 핵을 무력화시키자는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행위는 이제 신물이 난다. 송이 바쳤던 세폐는 거짓된 평화와 비어가는 국고로 국가의 목을 올가미로 죄여 오듯 천천히, 그리고 치명적으로 송의 국운을 좀먹었다. 사설의 글쓴이는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에게 올가미를 씌우겠다는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멀리 보는 지혜와 위기의식이다. 칼 없는 정의는 한낱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과 과오가 보여주는 씁쓸한 사실에도 대북 정세에 대해 순진하고도 왜곡된 주장을 일삼는 한겨레신문은 언론의 양심이 있다면 냉정함을 되찾고 부디 눈앞의 사실에 관심을 가지길 바란다. /정의일 경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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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 지원을 재개하고 핵을 무력화시키자는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행위는 이제 신물이 난다./사진=연합뉴스 |
(이 글은 자유경제원 자유북소리 언론고발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정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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