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빨리" 박한철과 달리 공정·엄격성 강조…균형·중량감 인정
   
▲ 조우석 주필
안국동에서 모처럼 마음 놓이는 소식이 들려왔다. 판단을 내리기엔 아직은  이르다. 그러나 이정미 권한대행 체제의 헌법재판소가 균형감각 회복과 함께 그동안 논란을 빚어왔던 공정성 시비로부터 벗어날 조짐을 일부 보여줬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10차 공개 변론이 열린 1일 헌재 분위기가 그랬다. 박한철 퇴임 이후 권한대행 체제로 열린 첫 변론에서 이정미 권한대행은 이전과 달라진 분위기를 보여줬다. 그는 "심판 과정에서의 절차적 공정성과 엄격성이 담보돼야만 심판결과의 정당성도 확보될 것"이라고 강조했는데, 이 발언이 새삼 음미되고 있다.

졸속 탄핵재판은 재앙 가져온다
 
너무도 당연한 이 말이 이례적인 건 박한철 소장이 강조했던 신속 재판에 대한 강조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정미 대행의 이 말은 지난달 말 박한철이 "3월 13일까지 선고해야 한다"고 날짜까지 못 박으면서 불거졌던 졸속 탄핵 재판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의식한 것이다.

때문에 이정미 대행의 이 발언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면 안 된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3월13일 이전 조기 선고의 방향이 헌재 차원에서 바뀌었다는 조짐은 현재로선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정미 퇴임 이전, 그러니까 '3월9일 선고' 목표에 맞춰 탄핵심판의 실무를 진행하고 있다는 징후도 헌재 내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이 와중에 조중동을 포함한 모든 언론이 2월말 3월초 선고 일정을 기정사실화했는데, 이건 헌재를 향해 그렇게 하라는 압박에 다름 아니다. 대선 주자들 움직임을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것도 현직 대통령 박근혜를 숫제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 탄핵 기각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며 헌재를 겁주는 공포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여론재판의 상황을 넘어 가히 전체주의 분위기다.

냉정하게 말하자. 이정미 대행체제 이전의 헌재는 뭔가에 쫓기는 듯했는데, 그건 정상이 아니었다. 백번을 양보하자면 그건 국가 리더십 공백 장기화를 막자는 충정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조작되고 부풀려진 촛불여론에 스스로 굴복한 모양새이고, 짜 맞추기 졸속 재판에 다름 아니었다.

   
▲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10차 공개 변론이 열린 1일 "심판 과정에서의 절차적 공정성과 엄격성이 담보돼야만 심판결과의 정당성도 확보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연합뉴스

헌재가 촛불여론에 굴복?
  
치열한 법리 다툼을 포기한 채 여론재판에 묻어간다는 비판은 그래서 나왔다. 우리 의문은 그 때문이다. 절차적 공정성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 다분히 정략적 성격의 탄핵 재판이 과연 국민적 합의를 창출해낼 수 있을까? 그건 국민통합은커녕 내전에 불을 당기는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하다. 이정미 대행의 1일 발언은 이런 우려에 대한 그만의 처방 내지 균형감각 회복으로 해석된다.

그 발언은 이정미 대행이 박한철 체재의 문제점을 익히 파악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사례가 한두 개가 아닌데, 일테면 "3월9일 선고가 좋겠다"고 했던 1월 말 발언이 대표적이다. 마침 하루 전 날 권성동 국회측 소추위원장이 JTBC에 출연해 3월9일 선고할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불과 하루 차이의 두 발언은 헌재-국회가 짜고 친다는 뒷말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분위기를 굳히는데 주심 재판관 강일원이 큰 역할을 했는데, 그 또한  문제였다. 그의 일탈은 한둘이 아니다. 재판 초기 3만2천 쪽 분량의 검찰 수사 서류에 대해서 복사 후 1주일 뒤부터 증거 동의 여부를 요청했던 것부터 억지였다.

대리인단 변호사는 숫자가 많으니 나눠 읽으라고 강요했던 주인공도 그였다. 이런 노골적인 편파적 태도는 지금까지도 한결 같았는데, 그건 마치 "나는 탄핵 인용 쪽"이라는 선언인양 들렸을 정도다. 그러면 안된다. 본디 그는 법원 내부에서 전설로 통해왔다. 깔끔한 재판진행과 업무처리 솜씨로 칭송을 받아온 주인공이다. 그가 5년 전 헌재 재판관에 임명됐을 때 분위기도 그러했다.
  
석연치 않은 강일원, 균형감각의 이정미
 
그만한 역량이면 헌재 재판관 직책보다 한 수 위로 쳐주는 대법관이 못됐던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는 이기 적지 않았을 정도다. 그러던 강일원의 추락은 실론 안타깝다. 그와 야당 사이에 모종의 정치적 거래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도는 것도 결국은 그의 언행 탓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박한철-강일원이 한 몸이 돼 재판 분위기를 주도하자, 헌재 구조가 묘하게 돌아갔다.

자연스레 이 둘이 탄핵 인용파로 관측됐고 이진성-김이수 재판관도 그쪽으로 한 묶음 처리됐다. 반면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헌재 안팎에서 기각 의견을 낼 것으로 관측되던 서기석-안창호-조용호–김창종 재판관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희미했고 역할도 크지 못했다. 목소리 높은 진보, 숨죽인 보수라는 사회 분위기가 안국동에서도 재연된 것이다.

그럼 이정미 대행은 어떠한가? 그는 분류컨대 인용파의 한 명이라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본래 대법원장 몫으로 2011년 3월 헌재 재판관이 됐는데, 그는 이번 탄핵 재판과정에서 시종 냉정한 자세를 유지해 외려 눈길을 끌었다. 때문에 지금은 그를 중립으로 분류하는 이가 적지 않을 정도다.

물론 통진당 해산 심판 당시 주심을 맡아 찬성 의견을 낸 바 있으니 자유민주주의자인 것만은 분명하고, 여기에 더해 소중한 균형감각을 가진 것도 그의 미덕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1일 발언은 이 나라의 명운이 걸린 결정을 졸속으로 할 순 없다는 뜻으로 적극 해석된다.

재확인한다. 탄핵 결정은 대한민국의 행정부의 수반의 진퇴를 좌우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불복을 할 수 없는 단심(單審)이다. 빨리 빨리 재판이 아니라 공정한 적법 절차를 새삼 강조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 제정신이 아닌 정치권과 언론이 제 아무리 뭐라고 떠들어대도 결국 균형을 잡을 건 헌재뿐이다.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헌재 재판관 한 사람의 부재는  9명 중 1명의 결원(缺員)이 아니라 헌재 구조의 결함을 뜻한다. 재판과정이 왜곡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정미 대행이 이 상황을 엄중히 판단하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대통령의 몫의 헌재 재판관의 임명을 촉구하는 것도 신중히 검토해주길 바란다. /조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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