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한 압박정책으로 소련 붕괴시켜…김정은 정권 반면교사 삼아야
   
▲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
힘없이는 평화도 번영도 없다
-최악의 안보위기에서 냉전 승리를 이끌어낸 레이건 행정부의 부국강병 정책-

미국이 가장 위대했던 시기가 있다. 서슬퍼런 소련의 핵 위기에 당당히 대응했고, 심지어는 스타워즈라는 엄청난 구상을 끌어내면서 급기야는 소련을 무너뜨리는 기반을 마련했다. 바로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대통령의 집권 시기이다. 도대체 무엇이 레이건 행정부를 승리로 이끈 것일까?

1. 미국의 흑역사와 레이건의 등장 

레이건의 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 미국의 역사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는 그야말로 미국의 암흑기이자 쇠퇴기였다. 베트남전이 장기화되고 버티다 못한 미국에서 닉슨 독트린이 나오자, 공산화를 우려하던 아시아의 동맹국과 우방국들은 실망했다. 여기에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에 시달리면서 무려 2년간 힘도 못쓰다가 사퇴했고, 부통령으로 바통을 넘겨받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베트남전 패전과 대공황 이래 최악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고전했다. 

1976년 대선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포드는 현직 대통령임에도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후보가 되었다. 이때 상대가 바로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하지만 경제불황과 융통성 없는 정책 추진으로 허덕이던 포드는, 대선에서 지미 카터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카터 행정부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설득하여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맺거나, 소련과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상을 조인하며, 후진국 국민들 인권을 보호한다는 도덕정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대책없는 낭만주의자였던 지미 카터는 베트남전 패배로 사기가 저하된 군을 개혁하겠다며 실제로는 군을 재건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79년 이란혁명의 결과 미국 대사관 인질극이 일어났지만,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군은 인질구출작전을 제대로 시도해보지조차 못한 채 실패했다. 또한 임기 말기에 터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건으로 인해 1980년 하계 올림픽에 반공국가들이 보이콧을 하기에 이르면서 카터의 데탕트 시도는 성과없이 끝났다. 

1970년대 미국의 고전은 한국에게도 시련이었다. 닉슨 독트린으로 뒤통수를 맞은 우리 정부는 미군이 없더라도 북한의 위협에서 맞설 수 있도록 꾸준한 준비를 해왔고, 실로 단시간 내에 방위산업을 육성하면서 능력을 키워왔다. 당시 박정희 정부의 인권상황을 문제시 삼았던 카터행정부에서는 심지어는 1982년까지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는 계획까지 진행되었지만, 미 군부의 맹렬한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 레이건은 보수주의를 되살렸으며, 실용주의적 보수를 증명함으로써 미국을 다시금 우파의 나라로 전환시켰다. 레이건은 평화란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보장해야만 지켜지는 것이라는 것을 입증했다./사진=자유경제원


2. 레이건의 당선과 미국의 변화 

레이건은 철저한 보수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였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 증세를 펼쳐 재정흑자를 이루기도 했고, 1976년에는 포드 대통령에 대항하여 대통령 후보로 나서 호각을 이루기도 했다. 그는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인단 538명 가운데 489표를 득표(득표율은 50.7%)를 기록하며 압도적 지지하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50개주와 DC 가운데 무려 44개주를 레이건이 싹쓸이 한 것이다. 레이건이 당선된 날 이란은 억류했던 미 대사관 인질을 모두 석방했다. 사건 발생 444일만의 일이었다. 

레이건의 목표는 연방정부를 바꿈으로써 미국을 부국강병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카터 행정부시절 미국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졌다. 높은 실업률과 두자릿수 물가상승률을 기록하며 경제성장이 마이너스에 머물렀다. 우리 같으면 불황의 타계책으로 정부조직을 키운다거나 공무원을 늘린다는 등 파퓰리즘적인 아이디어가 쏟아졌겠지만, 레이건은 근본적인 원인을 오히려 ‘비대한 정부‘에서 찾았다. 미국을 되살리기 위한 경제정책으로 레이건은 ‘레이거노믹스’를 들고 나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 이후 48년간 지속된 '큰 정부'에 정면 도전한 것이다. 

레이건은 보수주의 정치인이었지만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혁명적인 발상들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조세감면을 통해 경제의 총공급을 확충하겠다는 공급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을 받아들여 정책화했다. 부자들이 고용과 소비를 늘리면 낙수효과로 국민 전체에게 돈이 돈다는 것이 기본아이디어였다. 불필요한 정부사업을 폐지하면서 작은 정부를 추구했다. 심지어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앞으로 나는 나라의 경제를 주저앉히고 생산성을 떨어뜨린 장애물들을 제거하려 합니다. 정부의 여러 분야 사이에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발전 속도는 마일이 아니라 인치와 피트로 재야 할 만큼 느릴지 모르나 우리는 전진할 것입니다. 이 거대한 산업국가를 잠에서 깨우고 정부를 그 재정능력 안에서 일하게 하고 우리의 징벌적인 세금을 가볍게 할 것입니다. 이 일들이 우리의 최우선 과제이며 이 원칙에는 어떠한 양보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워낙 심각하게 망가진 미국 경제는 손쉽게 되살아나지 않았고, 레이건도 취임후 2년간은 엄청난 불경기 속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불경기는 오히려 튼튼한 경제로 가기 위한 시련의 시기였다. 드디어 감세가 효과를 발하면서  1983년부터는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이 함께 10퍼센트 아래로 떨어졌고, 기업들은 투자를 늘려나갔다. 레이건의 이러한 노력은 “레이건 혁명”으로 불리면서, 이후 미국 경제정책의 중요한 기조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3. 악의 제국에 대항하라 

레이건이 1980년 대선 당시부터 미국의 힘과 번영을 회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를 위한 정책이 바로 감세와 작은정부, 그리고 국방력의 향상이었다. 그야말로 부국강병을 내세운 것이다. 왜 레이건은 국방력 향상을 내세웠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는 냉전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냉전 중에서도 가장 불리했던 시기라는 위기감이 당시 미국을 감쌌다. 카터 행정부 동안 감축을 거듭하던 미군은 이제 소련과 비교하면 엄청난 열세에 시달린다는 판단이었다. 즉 이제 세계를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찌보면 지금 미국의 상황과 유사하다. 베트남전쟁의 패배와 그 후유증으로 군대는 피폐해졌다. 무려 10년이 넘는 베트남전에서 엄청난 전비의 지출로 인하여 미국이 더 이상 대규모 전쟁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10년이 넘는 대테러전쟁으로 인하여 재정적 어려움에 빠졌다가, 시퀘스터로 엄청난 국방예산의 압박을 받고 있는 현재의 미국과 닮아있는 모습이다. 현재 미국의 힘빠진 모습은 NATO나 일본·호주, 심지어는 우리나라조차도 과연 안보공약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관련국가들을 걱정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런 소련의 군사적 우위를 역전하는 것이 레이건의 과제였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될 터였다. 감세와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경제기조와는 상충될 수도 있는 주장이었다. 여기에 대해 레이건은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논리를 만들어냈다. 바로 소련이 맹주로 있는 공산권에 대한 저항의식, 즉 반공주의이다. 

레이건의 국방정책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반공주의에 바탕하고 있다. 소련의 위협을 막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가 소멸될 수도 있다는 강력한 믿음에 바탕하는 것이다. 심지어 레이건은 1982년 6월 영국 하원에서 연설하던 중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지칭했고, 소련의 위협을 막지 못하면 미국을 포함한 자유세계가 절멸할 수 있다는 선악의 대결구도를 만들었다. 소련의 공격에서부터 국가를 구하는 것은 정의이며, 국가적으로 이뤄야할 가치인 것이다. 

그래서 국방에 쓰는 돈은 아깝지 않았다. 카터 행정부에서 국방비는 1조1천억 불이었지만, 레이건 행정부는 5년 만에 1조5천억 불까지 증액시켰다. 레이건은 국방에만큼은 예산을 아끼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세웠다. 또한 이러한 국방의 노력은 단순히 미군의 국방력을 높이는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소련이나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자유의 투사’들을 지원하는 것에도 적용된다. 

   
▲ 북한 김정은의 북핵 위협에 맞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부당한 압박을 가하는 제3국의 모든 압박도 단호히 물리칠 때다./사진=연합뉴스

4. 레이건 독트린의 등장 

미국이 최초로 선언한 외교정책노선은 1823년 12월 제임스 몬로가 선언한 몬로 독트린, 즉 고립주의노선이다. 그 핵심은 미주 대륙은 유럽과는 독립되어 있고 정치적으로 다르므로 서로 간섭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세계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겠다는 뜻의 고립주의가 아니라, 유럽의 간섭을 막고 힘을 키워내겠다는 의미에 더욱 가까웠다. 이러한 몬로주의는 심지어는 2차대전까지도 기조로서 유지되어 왔다. 미국은 1·2차 세계대전의 참전까지도 다소 꺼려왔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난 후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공산주의의 세계 확산을 목표로 삼던 소련에 대항하여 그 진출을 막겠다는 봉쇄정책이 핵심이 되면서 반공·반소련을 기치로 미국은 전 세계로 군사력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같은 맥락 하에서 공산주의의 침략에 대응하여 에너지의 보고인 중동(Middle East)을 중시하겠다는 아이젠하워 독트린도 1957년 발표되었다. 

그러나 미소의 힘겨루기는 닉슨이 데탕트를 추구하고 1969년 닉슨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완화되는 듯 했다. 핵공격이 아니라면 미국은 더 이상 베트남전과 같은 군사개입을 피하면서, 핵우산은 여전히 제공하겠지만 1차적으로 아시아 각국의 방위는 각국이 스스로 책임지라고 명시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을 겪고 나니 더 이상 유럽과 아시아를 동시에 지키기는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는, 실상 둘 중에서 유럽을 선택한 것이다. 또한 카터 행정부에 이르러서는 석유파동 등으로 다시금 중동의 중요성을 인지하고서, 국익을 위해서라면 페르시아만에서 군사적인 조치를 취하겠다는 카터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러나 아프간 침공 등 소련의 군사적 모험주의가 대두되고 미국의 군사적 열세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자 레이건은 과감하게 레이건 독트린을 들고 나왔다. 더 이상 물러나지 않고 과감히 싸워나가겠다는 레이건 독트린에서는 다음의 5가지와 같은 내용이 핵심이다. 

1. 힘이 없이는 평화도 없다. 
2. 냉전은 도덕적 싸움이다. 
3. 상호확증파괴는 국가안보전략으로 적합하지 않으므로 미사일 방어를 추구해야 한다. 
4. 초강대국 간에는 핵무기를 줄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애는 방향으로 협상을 끌고 가야 한다. 
5. 초강대국 간에는 상호간 불신을 줄이고 단순한 데탕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평화체계를 이룩해야만 한다. 

이러한 레이건 독트린은 이미 1980년 당선 이후부터 꾸준히 추진되어 왔지만, 1984년 선거에서 재선 이후 1985년 연두교서의 내용에서 가장 잘 구체화되었다. 즉 미국은 자국과 동맹국 및 우방국의 국익을 해하는 소련의 침략을 막아내야만 하며, 소련과 대항하려는 제3세계 국가를 효율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소련의 영향력을 봉쇄하는 차원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억제하고자 하는 롤백 정책의 부활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요컨대 닉슨이나 카터의 정책이 소련팽창에 대한 소극적인 저지라면, 레이건 독트린은 공산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대결의지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 미국의 니미츠급 핵추진 항공모함인 로널드 레이건호(CVN-76·10만4천200t급)가 작년 10월 16일 해군 부산기지에 입항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4. 별들의 전쟁을 시작하다

레이건 독트린 하에서 소련에 대한 군사적 억제정책도 이전보다 훨씬 과감해졌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83년 발표된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 SDI), 일명 ‘스타워즈’였다. 전략방위구상이란 기존의 핵전략을 완전히 부정하는 새로운 시도였다. 여태까지 핵전략의 기본골자는 상호확증파괴였다. 즉 나도 너를 죽일 수 있고, 너도 나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서로 갖고 있으니, 결국 그 누구도 핵을 먼저 쓸 수 없어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SDI에서 미국은 담력싸움 수준의 상호확증파괴보다는 더욱 안전한 핵전략을 추구하게 되었다. 즉 적의 핵미사일이 미국 본토에 떨어지기 전에 모두 요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SDI는 조기경보인공위성, 궤도요격인공위성, 그리고 지상요격 미사일의 3대 요소로 구성된다. 순서는 위성으로 ICBM과 SLBM 발사를 실시간 감시 추적하다가 우선은 우주공간에서 레이저로 요격하고 다음 단계로는 미사일로 격추한다는 것이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SDI는 핵 대응전략임에도 비핵무기로 핵무기를 요격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엄청난 규모만큼이나 투입될 예산소요도 거대하여 SDI 사업 전체의 예산은 1조 불로 추정되었다. 

SDI의 등장은 미소간의 대화가 중단됨에 따라 등장한 극약처방이기도 했다. 힘의 논리를 추구하는 레이건 정권은, 등장과 동시에 핵을 통한 ‘참수타격’ 전략을 구체화했다. 그리고 M-X 핵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B-1 차기 전략폭격기와 오하이오급 차기 전략잠수함의 양산태세에 돌입하자, 소련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방공시스템에 집중했고, 특히 조기경보시스템완성에 매달렸다. 1983년의 KAL기 격추사건도 바로 그런 소련의 신경질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물론 SDI는 너무나 비싼 반면 매우 실험적이었기에 당연히 그 성과는 미약했다. 폐기 전까지 무려 700억 불이 투입되었지만, 당장 쓸 수 있는 무기체계는 단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SDI의 결과, 현재 미사일 방어체계의 핵심인 PAC-3와 THAAD, SM-3 등의 개념이 정립되었고, 레이저무기에 대한 연구도 상당부분 진행되었다. 엄청난 정찰위성들을 포함하는 실시간 감시체계가 구축된 것도 SDI의 덕분이었다. 결국 SDI를 추진한 지 20년이 다 된 부시행정부에서야 MD의 구축이 구체화되면서 SDI는 사실상 부활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SDI의 등장은 소련으로 하여금 핵전력을 더욱 강화하도록 하여 군사력에 투자를 가속시킴으로써 경제가 무너지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5. 미래전쟁의 그림을 그리다

이란 인질석방으로 시작한 레이건 행정부는 소련 이외에도 시리아나 이란 등 중동국가들이나 니카라과 같은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대표적인 것이 1983년 베이루트 미군 막사 테러나 1985년 TWA기 납치사건이었다. 이외에도 미국인이나 서구인에 대한 납치나 테러 등 다양한 공격들이 잇달았다. 심지어는 이란-이라크 전쟁 와중에 페르시아만을 드나드는 제3국의 유조선들까지 공격대상으로 노출되는 ‘유조선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다보니 응당 대결해야만 할 대상들도 많아졌다. 리비아와는 1981년 공중전을 벌이면서 불편한 대치를 해오다가, 드디어 1986년에는 폭격까지 감행한다. 미국인에 대한 테러를 감행한 테러단체를 지원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미국의 뒷마당인 중미에서는 그레나다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군사작전으로 이에 맞섰다. 유조선 전쟁에서는 해군함의 초계임무에 더하여 특수부대가 상시배치되면서 원유수송로를 지켜내야만 했다. 

대결의 형태는 또한 언제나 군사적인 모양새에 국한되지 않았다. 저강도 분쟁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소련의 힘을 소모시키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히딘을 지원하기 위해 CIA의 SAD(준군사작전팀)나 그린베레 대원들이 투입되었다. 니카라과에서는 역시 CIA와 그린베레가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면서 산디니스타 좌익정권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터져나오면서 레이건 행정부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들은 미국에게 21세기를 대비하도록 커다란 준비의 계기가 되었다. 베트남전 이후 프로페셔널리즘이 상실되어 가던 군대는, 유례없는 국방개혁으로 첨단군으로 되살아났다. 그레나다 침공 때까지만 해도 육·해·공군이 따로 놀면서 허점을 보이던 펜타곤은 골드워터-니콜스 국방재조직법으로 인하여 군사적 효율성과 문민통제를 이루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국방개혁은 이후 미국이 걸프전에서 인류 역사상 놀랄만한 전쟁승리의 기록을 세우는 밑거름이 되면서 냉전 이후 미국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위치로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 미국이 가장 위대했던 시기가 있었다. 서슬퍼런 소련의 핵 위기에 당당히 대응했고, 심지어는 스타워즈라는 엄청난 구상을 끌어내면서 급기야는 소련을 무너뜨리는 기반을 마련했다. 현재 북핵 위협에 처한 우리나라는 이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사진=연합뉴스

6. 레이건의 성과

레이건은 과감한 압박정책으로 소련이 붕괴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SDI 정책이 기술적으로 성공했든 실패했든 상관없이 어쨌거나 소련 붕괴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평화란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보장해야만 지켜지는 것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국내에서의 번영을 바탕하여 해외에서 강경한 입장을 펼치면서 국익을 지켜나가는 ‘군사력에 바탕한 힘의 정치’는 현대적 부국강병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더 크게는 레이건은 보수주의를 되살렸으며, 실용주의적 보수를 증명함으로써 미국을 다시금 우파의 나라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레이건의 사상과 성과는 공화당 내의 신보수주의자들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소위 네오콘의 씨앗이 바로 이때 뿌려져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꽃을 피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자유경제원에서도 이미 자유TV를 통해 소개했던 레이건의 연설을 아래에 다시 정리해본다. 1964년 공화당 후보인 배리 골드워터의 지지연설은 레이건에게 전국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이 연설을 굳이 다시 인용하는 이유는,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북핵 위기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우리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만을 돕는다. 힘을 내서 싸워나자. 북핵에, 그리고 부당한 압박을 가하는 제3국의 모든 압박에 대하여.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 


베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에 대한 지지연설 (1964년 10월 27일)

(전략) 

한 번 제대로 따져봅시다. 평화와 전쟁 중에서 선택하라면 답은 명확합니다. 그러나 평화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오로지 하나, 바로 항복 뿐입니다. 

그 이외의 어떠한 방법도 위험이 반드시 수반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유화정책이 더 위험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순진한 진보주의자 친구들은 자신들의 수용정책이 사실은 유화정책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실은 평화냐 전쟁이냐의 선택이란 없습니다. 오직 싸울 것이냐 항복할 것이냐의 선택만 있을 뿐입니다. 자꾸 수용하다보면 계속 밀려나고, 후퇴하다보면 결국 마지막 요구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바로 최후통첩입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될까요? 

니키타 흐루쇼프는 자기 국민들에게 미국의 답이 무언지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은 현재 냉전의 압박에 이기지 못하고 후퇴하고 있으며, 최후통첩의 시간이 되었을 때는 기꺼이 항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쯤이면 미국의 정신과 도덕과 경제가 취약해질 것이기 때문이란 겁니다. 흐루쇼프가 이렇게 믿고 말할 수 있는 건, ‘어떤 값을 치러도 평화를 이뤄야한다’라거나 ‘죽는 것보다 빨갱이가 되는 것이 낫다’ 라거나 한 평론가가 말했듯 ‘버티고 서다가 죽느니 무릎을 꿇고 살겠다‘라는 말을 미국 내부에서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말들이 전쟁을 불러옵니다. 왜냐하면 이런 소리들은 우리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삶이 귀하고 평화가 달콤함을 알지만, 사슬에 묶인 노예 신세까지 되어가면서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생에서 목숨을 바칠만한 게 없다면, 언제 그래야만 할까요? 적 앞에서 일까요? 모세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파라오의 노예로 살라고 얘기해야 할까요? 예수는 십자가를 거부했어야 할까요? 콩코드 다리에서 우리 건국시조들은 총을 내려놓고 소리를 죽였어야만 할까요? 

역사 속의 순교자들은 바보들이 아니었습니다. 나치의 진격을 막아내다 희생된 우리의 명예로운 순국선열들은 헛되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평화로 가는 길은 어디있을까요? 대답은 정말 간단합니다. 

당신과 내가 적에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으면 됩니다. 이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는 대가라고 말입니다. 너희들이 넘어선 안되는 지점이 있다고 말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말했습니다. 인류의 운명은 물질적인 계산으로 잴 수 없고, 세계가 거대한 흐름에 휩싸였을 때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라는걸 알게 된다고 말입니다. 

또 그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한, 또는 이를 초월해서도, 우리가 좋던 싫던 간에 의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운명과 마주했습니다. 우리 후손을 위해서 이 땅에서 최후이자 최상인 인류의 희망을 보존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후손들은 수천년의 암흑 속으로 마지막 발걸음을 걷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지난 2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강한 국가를 만든 레이건의 안보정책: 대한민국에 주는 의미’ 레이건 탄신 106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이 발표한 발제문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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