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57)-동양삼국의 독립과 평화공존의 희구
안중근(1879~1910) 『동양평화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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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사형선고를 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 중 1910년 3월 26일 사형 집행으로 고귀한 삶을 마쳤다. 그가 사형선고에 대한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 쓰고자 한 책이 <동양평화론>이다.
하지만 일제는 안 의사가 쓸 '동양평화론'이 두려워 책을 쓸 시간만큼 형의 집행을 연기해 주겠다는 약속마저 어겼다. 결국 <동양평화론>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 책은 서문, 전감(前鑑), 현상, 복선(伏線), 문답 등 5단계로 집필될 예정이었으나, 서문과 전감에서 끝나고 말았다.
안 의사는 전쟁 수행중인 군인이었다. 스스로 ‘대한국 독립의군 참모중장’이라고 밝혔고,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이 결코 개인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독립의군 군인의 직분 수행의 일환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적의 괴수를 향한 총탄발사는 그의 독립전쟁의 또 다른 유격 전투였던 셈이다.
그가 법정 최후 진술에서 "한국에 대한 이토의 시정 방침을 개선하지 않는 한, 한국의 독립은 요원하며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리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아가 자신을 전쟁 중에 잡힌 포로로 대접하여 만국 공법에 따라 처리하라고 주장한 이유도 같은 취지다.
안 의사는 법정에서 이토 저격 계획을 세운 목적과 동기를 분명하게 밝힌다. 그는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에 맺은 을사보호조약은 황제의 옥새도 없이 총리대신의 승낙도 없이 한국민을 기만하여 체결된 것임으로 불법 무효라고 주장한다.
1907년의 정미7조약 역시 칼로써 황제를 협박하여 강제로 체결된 것이라며 분개한다. 이는 당당히 말했다. "한일 두 나라의 친선을 저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 이토를 한국의 의병중장의 자격으로 제거한 것이다." 자신은 결코 단순히 이토를 죽인 자객이 아님을 역설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공판과정에서 줄기차게 일제의 침략의 간계를 세계에 규탄하고, 자신의 거사가 동양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의 일환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나아가 이토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려 했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 죄악' 15개조를 설명하려 했지만 재판장에 의해 중지 당하기도 한다.
이렇듯 안중근 의사의 재판은 불공정하게 진행됐다. 이미 허가했던 한국인 변호사는 물론 영국, 러시아, 스페인 등의 외국변호사도 일체 변호가 허가되지 않았고, 오로지 일본인 관선 변호사에게만 변론이 허용되었다. 더구나 일본 정부는 관동도독부 법원에 안 의사 '사형'을 이미 지령한 상태였으니 재판의 진행은 형식적일 수밖에 없었다.
안 의사가 구상한 동양평화론의 내용은 무엇일까? 미완으로 끝나 자신의 육필로 그 구상의 전모를 다 보여주진 못했다. 하지만 히라이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과 나눈 대화를 통해 밝힌 <동양평화론>에서 대강의 실천방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 일본이 점령한 여순을 중국에 돌려주고 중립화한 후 그곳을 한중일 삼국이 공동 관리하는 항구를 만든다. 또한 3국이 대표를 파견하여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고 회비를 모금하며 각 지역에 동양평화회의의 지부를 둔다.
(2) 원만한 금융을 위하여 공동의 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이 함께 쓰는 공용화폐를 발행하도록 한다. 각 지역에 은행의 지부를 둔다.
(3) 삼국의 청년들로 공동의 군단을 만들고 그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을 높인다.
(4) 한중 두 나라는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한다.
(5) 한중일 세 나라의 황제가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여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는다. 세계 민중의 신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안 의사가 생존할 당시까지 밝힌 이러한 동양평화의 구상의 일단은, 당시 일본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압도적 우세를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삼국 간 경제, 교육, 군사적 협력공동체를 모색했다는 점이 특징이자 시대적 한계로 볼 수 있다.
특히 삼국의 황제의 독립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으려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미 외교권과 군사권을 일제에게 박탈당한 지 오래되었고 합방 당하기 직전에 놓인 1910년도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제안은 바람 앞에 등불의 신세인 조선의 독립을 유지시켜 보려는 간절한 기구라 하겠다. 한국의 자주독립국의 위치를 확보하고 일본의 우월한 경제, 교육, 군사적 협력을 통해 동양 삼국의 평화를 만들어 보고자 분투하던 안 의사의 간절한 희구는 매우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일본의 중심적 역할을 인정한 것은 현실적인 국제 정세의 역학 관계를 냉철하게 인식한 안 의사가 일제를 추켜세움으로써 국제공법 상의 도의적 국가로서의 행동규범을 지키게 압박하려는 깊은 뜻이 담겨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공판 과정에서도 자신의 희망이 "일본 천황의 취지와 같이 동양평화를 이루고 오대주에도 모범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는 일본측 주장은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고 하겠다.
일본천황이 표방한 '동양평화'가 국제사회를 향한 위선의 언명에 불과함을 안 의사가 어찌 몰랐겠는가. 하지만 안 의사는 일본 천황이 가식적으로 표방한 '동양평화'의 취지를 진정한 정책 취지로 의도적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동양평화'의 언명의 가치를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려한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아니었을까?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간웅 이토 히로부미를 일거에 숨지게 하였지만 일제의 거대한 마수를 물리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거는 한국을 불법적으로 강점하여 국권을 박탈하고 나아가 중국을 넘보던 일제의 흉계와 야욕을 국제사회에 명확하게 환기시켰다. 특히 한국인의 독립의지와 대한남아의 기개를 일제에 뚜렷하게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아직도 하얼빈 역에서 이토의 저격에 성공한 후 안중근 의사가 가슴 벅찬 목소리로 삼창한 '코레아 후라(大韓萬歲)'가 귓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감방에서 죽음을 앞두고 촌각을 다투며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안중근 의사의 절박한 심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다. 감옥에서 아무런 참고자료도 없는 상태에서 동양평화의 거대한 구상을 글로 옮기던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동양평화론>의 미완성으로 인해 안 의사의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과 평화체계 구축을 위한 예지와 판단력, 철학적 깊이를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다행히 이 책에 함께 실린 짧은 신문기고 글인 '인심결합론'과 최후공판 기록, 안중근의 옥중서한, 당시의 신문기사 내용과 연보를 통해 그의 의거에 대한 당당한 소신과 철학, 일제의 불법과 만행을 규탄하는 결연한 의지와 한국의 독립과 동양 삼국의 평화를 갈구하는 대의를 엿볼 수 있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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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도서: : 『동양평화론(외)』, 안중근 지음, 범우사(2012),116쪽. |
[박경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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