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미 대사관 첫 포위시위는 반미의 본격화 첫 신호탄
   
▲ 조우석 언론인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 나라의 외교적 자살행위를 우린 언제까지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할까? 왜 안하무인 좌익세력은 미국-일본 등 동맹국의 주한대사관 앞에서 외교적 결례를 서슴지 않고 있고, 그런데도 공권력을 포함한 체제수호의 의무가 있는 주류세력은 미동도 못하는가?

몇 해 전 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을 설치해 외교적 결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 나라가 다시 사고를 쳤다. 이번엔 주한 미 대사관이 표적이다. 민노총 등 90여 개 반미단체로 구성된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의 24일 포위 시위가 문제다. 서울 도심의 미 대사관을 포위한 이른바 인간 띠 잇기 시위란 동맹 미국을 겨냥한 사실상의 적대행위다.

사드 반대는 핑계일 뿐이며 한미정상회담이 코앞인 상황에서 저들은 미국을 향해 실력행사를 해보였는데, 차제에 우리 현주소가 다 드러났다. 상황을 수수방관하는 듯한 공권력, 시위를 허용한 무책임한 재판부, 입도 벙긋 못하는 비겁한 지식사회는 가히 총체적 난국이다.

반미운동 성공 30년은 좌익의 작품

미 대사관 포위 시위란 오래 전부터 구조화됐던 한국사회의 반체제-반미 움직임이 또 다른 결정적 국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분수령이라고 나는 분석한다. "반미 목소리가 없는 나라"라는 인식을 깬 것이 1980년대 중반인데, 직후 빠르게 자리 잡아온 반미 움직임은 드디어 동맹국의 중요시설과 인력을 겁박하는 수준으로 성큼 발전한 것이다.

이게 어디로 갈 것인가를 가늠하려면 현대사의 반미운동 30년을 점검해야 옳은데, 건국 이후 본격적 반미운동의 출발은 1985년이다. <한국진보세력연구>를 펴낸 남시욱 박사에 따르면, 당시 학생운동권은 신군부의 광주사태 진압을 왜 미국이 묵인했는가를 해명하라고 시위를 한 것이 계기다.

그 이전 문부식 일당의 충격적인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82년)을 우린 기억한다. 그렇게 씨앗이 심어진 반미를 운동권이 조직화했는데, 1990년대 직후엔 친북-종북 성향을 가진 괴물로 빠르게 진화했다. 당시 그 움직임을 주도한 게 지금 청와대 비서실장 임종석 등의 전대협이라는 걸 세상이 다 안다. 그렇게 운동권이 주도하던 반미를 노무현 정부 이후에 시민단체가 바통 체인지를 하는 중요한 내부 변화를 연출한다.

   
▲ 24일 오후 '6·24 사드 철회 평화 행동' 참가자들이 미국의 사드배치 강요 등의 주권 침해 중단을 촉구하며 서울 종로구 미국대사관 앞에서 포위 행진을 마친 뒤 사드 현수막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민중연대(2003년 결성), 진보연대(2007년 결성)등이 그들인데, 그만큼 반미운동이 구조화되고 사회저변으로 확산됐다는 뜻이다. 그 직전 효순-미선양 사고를 대중적 반미운동으로 확산시켰던 것도 좌익의 기획인데, 당시 반미운동 중 가장 컸던 것은 맥아더 동상 철거(2004~2006년)이다.

6.25 때 우릴 구해준 은공 따위는 몽땅 잊고 "제국주의의 상징이니 끌어 내려야 한다"며 저들은 막무가내였다. 이게 한미간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했다. 당시 헨리 하이드 등 미 하원의원 몇 명이 대통령 노무현에게 "동상을 훼손하느니 차라리 우리에게 양도해달라."라고 요청했는데, 당시 미국인들은 한국에서의 소동을 보며 가슴에 멍들었다.

옛 중앙일보 "반공-친미는 헌법 이상의 합의"

정리하면 이렇다. 한국사회의 반미운동은 지난 30여년 좌익의 기획 중 가장 성공한 정치투쟁이다. 운동권이 불씨를 만든 뒤 시민세력이 이어받아 저변을 넓히고, 끝내 중앙권력까지 차지하는 동안 한국사회는 속절없이 당해왔다. 지금 대한민국이 휘청대는 건 반미라는 체제 위협요소를 제때에 제거하지 못한 탓이다.

누굴 탓하는 게 아니다. "반미 좀 하면 어때?"하던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았고, 이후에도 내내 변함없으니 결국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 결과 이 나라는 거의 통제 불능이다. 경북 성주에서 현지인-외부인이 똘똘 뭉쳐 사드 포대를 운용하는 미군부대의 기름 유입을 제약하는 무법천지를 연출하더니 급기야 대사관 포위 시위까지 벌였다.

10여 년 전 인천의 맥아더 동상에 시비 걸던 그들은 대담하게도 대한민국 안전을 책임진 미군병사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있고, 드디어 서울 도심의 주한대사관까지 겁박 중이다. 그 전에 대통령 특보란 자까지 나서서 외교적 자해를 거듭하는 판인데, 이걸 제대로 꾸짖는 이조차 드물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터졌을 때 모든 매체가 '반미 무풍지대'로 통하던 한국에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을 걱정했다. 그런 분위에서 당시 중앙일보는 이렇게 지적했다. "반공과 친미는 헌법 이상의 국민적 합의라고 단언할 수 있다."

35년 뒤인 지금 상황에서 보자면 조금 과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당시 저널리즘은 그래도 건강했고, 자유민주주의 한국사회를 떠받쳐주는 기둥의 하나였다. 사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을 세울 때 효율적인 미국 활용법, 즉 용미(用美)의 노하우를 발휘했다. 그건 친미-반미의 이분법을 떠나서 이 작은 나라의 생존법이었다.

그가 용미로 나라를 세웠다면, 박정희는 용일(用日)로 이 나라를 부자 나라 만들기에 성공했다. 한일 국교정상화를 매듭지으며 국제정치와 경제의 두 영역의 숙원을 함께 풀어낸 것이다. 즉 대한민국의 건국과 부국은 순전히 용미-용일의 연속적 성공 덕분이다. 기이하게도 지금 우린 꼭 그 반대로 움직인다.

미국에 삿대질하고, 일본과는 앙앙불락이다. 이런 과정에서 중앙일보 등 조중동이 체제수호 대열에서 이탈했다는 의구심을 심어준 지는 이미 오래됐다. 그래서 더욱 걱정이다. 한 나라가 망가지려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실감을 요즘 우리는 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묻자. 용미-용일로 일어섰던 나라가 묻지마 반미-반일과 함께 이대로 주저앉는가? /조우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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