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맥을 넘어 남한강 중류 장악…한강유역 진출의 교두보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그럼에도 우린 때때로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앎과 이해일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란 가수 정광태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사부(異斯夫)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사부 장군은 경상북도 동부의 작은 부족국가 신라를 한반도의 주역으로 끌어올린 분이다. 또 다양한 종족을 하나로 통합해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신라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인이기도 하다. 독도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 고취를 위해 미디어펜은 이사부의 흔적을 찾아 나선 김인영(언론인)씨의 '이사부를 찾아서'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異斯夫⑫] 도살성, 금현성 전투

소백산맥을 넘어 남한강 중류 장악…한강유역 진출의 교두보
 
1) 어부지리
 
   
▲ 김인영 언론인
백제는 온조왕이 한강 유역에 나라를 세운 뒤 고구려와 각축전을 벌였지만, 475년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전사했다. 한강유역을 뺏긴 백제 동성왕은 신라 이찬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임으로써, 고구려에 대항하는 백제-신라(羅濟) 동맹이 맺어진다. 이른바 나제(羅濟)동맹이다.

이 동맹은 그 이후에도 이어져, 성왕이 독산성 전투(548년)에서 신라군을 끌어들여 승리함으로써 한강유역을 다시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나제동맹은 여기서 끝났다. 혹자는 나제동맹을 깬 나라는 신라이고, 그 주인공이 병부령에 올라 군권을 장악한 이사부 장군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 성왕은 신라의 금관국 합병 이후 대가야와 잔여 소국을 사비성을 불러모아 가야 재건을 외치며 신라와의 대항을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적과의 동침은 깨져가고, 나제동맹에 균열이 생겼다. 독산성 전투 2년후(550년) 도살성과 금현성 전투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혼전을 펼치며 두 나라의 군사들의 기력이 쇠해있는 틈을 타서 신라 이사부 장군이 두 성을 빼앗았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백제본기, 고구려본기, 열전 이사부편등 4곳에서 나온다.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의 균형이 깨지는 중요한 대목이 도살성, 금현성 전투이고, 이 전투의 승자는 이사부 장군이었다.
 
1) 진흥왕 11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해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명을 두어 지키게 했다. <신라본기>

2) 양원왕 6년 정월, 백제가 침입해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했다. 신라가 이 기회를 틈타 두 성을 빼앗았다. <고구려 본기>

3) 성왕 28년 정월, 임금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게 해 빼앗았다. 3월, 고구려 병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했다. <백제본기>

4) 진흥왕 재위 11년인 태보(太寶) 원년에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군사를 출동시킬 것을 명했다. 이사부는 그들을 쳐서 두 성을 빼앗고는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수비하게 했다. 이때 고구려가 병력을 보내 금현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자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해 크게 승리했다. <열전 이사부편>
 
사료를 해석하면 백제가 충청북도 한강 중류를 장악하기 위해 우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 사비성과 도살성 중간에 있는 금현성을 공격해 도살성을 고립시키고, 한강 중류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의 대혈투가 벌어진다. 이사부는 어부지리(漁父之利)의 전법을 썼다. 두 나라가 한치의 양보없이 싸우다 지칠 무렵 군대를 동원해 두 성을 차지하고, 한강 중류를 차지했다. 신라가 드디어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에 발을 걸쳐 놓은 것이다.
 
   

2) 한강 중류 장악

도살성과 금현성이 어디인지에 대해,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학계에서는 도살성의 위치에 대해서 1) 충북 음성의 백마령 2) 충남 천안설 3) 충북 증평 이성산성과 진천 두타산성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로 나눠져 있다. 후대 선덕여왕때 김유신이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물리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금현성은 1)충북 진천군 서쪽이라는 설 2) 충남 연기군 진동면과 전의면 경계라는 설 등이 있다.

도살성과 금현성의 위치에 대해 삼국사기를 쓴 고려 중엽에도 정확하게 비정하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신라의 입장에서는 두 성이 모두 소백산 너머에 있고, 도살성이 금현성보다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남한강 수운을 지키는 길목이라는 사실이다.

이사부가 도살성, 금현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어, 충청북도의 남한강 중류를 장악하게 됐다. 남한강 수운은 육로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대량의 물자를 수송하는 교통로 역할을 했다. 태백산맥 서쪽과 소백산맥 북쪽에서 생산된 농산물, 목재등 임산물이 물길을 따라 이동했고, 이 강을 끼고 있는 평창, 단양, 충주, 여주, 양평등지엔 오래전부터 대규모 장이 열렸다. 신라로선 한강유역을 공략할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충청도의 표가 어디로 가는지에 권력의 향방을 가늠한다. 대선때만 되면 충청도 표를 의식한 발언이 쏟아진다. 삼국시대에도 충청도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치열했다. 이사부가 도살-금현성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경상북도 동쪽에 치우쳐 있는 작은 왕국은 한반도 주역으로 떠올랐다.

이제 신라는 백제 뿐 아니라 고구려의 표적이 됐다. 한강 지배를 위한 본격적인 혈투가 시작된다.

소백산 고개를 넘어 남한강 중상류를 장악한 이후 신라는 한강 하류와 경기도 일대에 대한 공세에 나선다. 이사부에 이어 진골출신의 거칠부, 금관국 왕족 출신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이 전면에 등장하고, 진흥왕은 점령지를 방문(巡狩)하면서 점령지 백성을 진무하게 된다.
 
 
   
▲ 단양 온달산성에서 바라본 전경. 남한강과 멀리 소백산맥이 보인다.

3) 가야 김씨의 참전

단양 적성비에 등장하는 인물이 도살성, 금현성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적성비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사서에 뚜렷하게 나오는 인물이 이사부, 비차부(比次夫), 무력(武力)이다. 두미지(豆彌智)는 탐지(眈知), 내례부지(內禮夫智)는 노리부(弩里夫)로 보는 견해가 있고, 깨진 글씨 가운데 □□부지는 거칠부(居柒夫)가 아니겠는가 하는 관측이 있다.

<삼국지 열전 거칠부조>에 진흥왕 12년(551년) 거칠부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받은 장군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의 이름이 나온다.

비차부는 551년 거칠부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해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개 군을 획득하는 장수중 하나다. 거칠부와 함께 한강 이북 공격에 나선 8장군 가운데 한사람이며, 직급은 17관등중 6등급인 아찬이다. [비문에는 아간지(阿干支)로 표현됐다.]

잡찬 탐지(耽知)·파진찬 노부(奴夫)는 적성비의 두미지(豆彌智)와 내례부지(內禮夫智)로 추정된다. 1년 후에 탐지는 적성비 두미지의 직위 파진찬보다 상위인 잡찬, 노부는 적성비의 내례부지의 관직인 대아찬의 상위등급인 파진찬으로 승진해 있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적성비에 등장하는 장군중 상당수가 승진해 한반도 중원공격의 선봉대로 나섰다고 보여진다.

적성비에는 또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해왕의 셋째 아들 무력이 나온다.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받들어지는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할아버지다. 김무력은 <삼국사기>에 자주 등장한다.
 
1) 진흥왕 14년(553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신라본기>

2) 진흥왕 15년(554년)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신라본기>

3)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

김무력은 적성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아 신라가 한강 하류, 즉 오늘날 서울과 수도권 일대를 새 영토(新州)로 확보하고 초대 군주를 맡게 된다. 이듬해 신라가 백제와 대가야, 왜의 연합군과 관산성에서 사활을 건 전투를 벌일 때 무력은 신주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군을 괴멸시키고, 임금 성왕을 죽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비석에 나오는 대아찬 내례부(內禮夫)는 누구인가. 학계에서는 적성비의 내례부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진흥왕 순수비에서 노리부(弩里夫), 세종(世宗), 노종(奴宗), 노부(奴夫), 내부(內夫) 등 다양하게 표기된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노리부는 음을 표기한 것이고, 세종(世宗)은 이름의 뜻을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세(世)'는 '누리'를 뜻하고, '종(宗)'은 높은 사람의 이름 뒤에 붙이는 어미격으로 '부(夫)'와 일치한다. 이사부를 태종(苔宗), 거칠부를 황종(荒宗)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노종, 내부, 내례부 모두가 음과 뜻을 혼용하면서 쓴 동일인물의 다른 이름이라는 해석이다.

이 인물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해왕(<삼국유사>에선 구형왕)의 맏아들이다. <삼국사기>에선 노종, <삼국유사>에선 세종이라고 표현했다. <삼국사기>엔 그의 활동이 여러차례 나타난다.
 
1) 진흥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를 쳐서 죽령 이북 10개 군을 확보하는데, 거칠부 휘하의 장군 가운데 한사람이 파진찬 노부(奴夫)다.

2) 진지왕 2년(577년) 10월, 백제가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침입하자, 임금이 이찬 세종(世宗)에게 명해 군대를 내, 일선 북쪽에서 그들을 공격해 쳐부수고 3천7백 명의 목을 베었다.

3) 진평왕 원년(579년)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고, 10년(서기 588년)에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마운령비와 북한산비에 내부(內夫)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인물이 역시 노리부이며, 적성비의 내례부도 노리부라고 한다.

이런 학계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노리부는 적성비에서 대아찬으로 시작해 파진찬을 거쳐 상대등까지 승진한다. 아버지 구해왕이 항복과 동시에 상등(上等)의 직위를 받은데 이어 그의 맏아들 노종도 상대등을 했고, 관산성 전투의 주역인 동생 무력의 손자 김유신이 태대각간에 올라 가야 왕족이 4대에 걸쳐 신라에서 재상을 맡게 되는 셈이다.

그러면 거칠부는 어디에 있는가. 적성비가 건립된 다음해, 적성 이북지역 10개군의 고구려땅을 빼앗은 주역 거칠부는 비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 고고학자들 사이에 이름이 지워진 '□□부지'가 거칠부라는 추론이 제기됐다.

하지만 적성비의 '□□부지'의 직위가 대아찬으로, 거칠부가 진흥왕 6년(545년)에 국사를 편찬한 공로로 파진찬으로 승진한 점을 감안하면 모순이 발생한다. 대아찬은 파진찬의 아래 등급으로, □□부지가 거칠부일 경우 적성비가 545년 이전에 설립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사부가 적성 주변에 있는 도살성과 금현성 등 2개성을 뺏은 것(550년)을 계기로 소백산맥 이북의 신라거점이 형성되고, 그 무렵 적성비가 건립됐다고 보는 것이 순리적이어서 지워진 사람이 거칠부가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주보돈 교수(경북대)는 확인하기 어려운 '□□부지'라는 인물이 거칠부로 추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적성비 건립연대를 진흥왕 11년(550년)으로 보았다.

거칠부는 이 곳 적성을 전초기지로 해서 다음해 고구려를 공격해 10개군을 탈취한 것은 분명하다. 적성비 건립의 시점을 기준으로 이사부와 거칠부가 야전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교대하게 된다.

즉 소백산 이남 지역에 배치된 신라군이 작전에 동원돼 죽령을 넘어 적성을 함락한 것이다. 구해왕의 셋째 아들 무력과 한강전투의 주역 비차부는 경상도 북부 지역의 군주로 군을 정비한 다음, 이사부의 지휘 아래 죽령을 넘어 적성 전투에 참가하고, 이후 지휘봉을 이어받은 거칠부 아래서 한강 유역과 관산성에서 백제, 고구려와 패권 싸움을 벌여 큰 전공을 세우게 된다. /김인영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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