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은 시대의 풍파에도 굳건한 경영철학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지금의 SK의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이다. 빚덩어리 선경직물을 위기에서 구하고 매출이 10배가 넘는 유공, 그리고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기까지의 과정은 우리 산업의 발전사와 궤를 같이한다. 오는 26일 최종현 회장의 20주기를 맞아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개척해 나간 한국 산업화의 선구자인 그의 삶을 재조명하고 그가 가진 신념과 철학을 되새겨보자.<편집자주>
[미디어펜=최주영 기자]“우리나라 무역적자가 1996년에 200억 달러를 기록한 것은 국가 비상사태입니다. 임금을 낮추고 저금리 정책을 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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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암수술을 받은 고 최종현 회장 (왼쪽 두번째)이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7년 9월,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 경제위기 극복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SK제공 |
1997년 9월. 생전 최종현 SK 선대회장이 산소호흡기를 달고 청와대를 찾아 김영삼 대통령에 전한 말이다. 당시 폐암 투병중이던 최 회장이 임종 직전까지 일등국가로의 비전을 놓지 않았던 충언이었다. 그러나 최종현의 이런 말들은 모두 무시당했다. 한 달 뒤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최 회장은 다음해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8년. 최종현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재계가 그를 가리켜 “10년 앞을 내다본 기업가”, “국가를 생각하는 기업가”라고 추모하는 이유도 바로 기업의 안위보다 나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 기업가 정신 덕분이다.
최종현 회장은 선경그룹을 이끄는 기업의 수장이었지만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기도 했다. 그가 전경련 사령탑에 오르자마자 정부에 던진 메시지는 파격적이었다. 무려 100가지 규제에 대한 완화를 요청하는 내용의 ‘경제계가 바라는 새 정부의 국가경영’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한 것. “기업에 규제를 최소로 하는 자유 경제”를 강조한 데 대해 정부의 눈에 곱게 보일리 만무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이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경제체제를 꾸준히 설파했다.
그는 1996년 열렸던 국회 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에서도 "지금 우리 경제가 매우 심각한 위기"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의에 나가서도 거침없이 ‘할 말을 다 한’ 기업인이던 그였다. 전경련 회장 시절 ‘Mr.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애칭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지론은 “안정과 성장이 같이 가야 한다. 성장을 위해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무조사 등 불이익을 겪으면서도 금리인하, 규제철폐, 쌀 시장 개방같은 민감한 문제에 고언을 서슴지 않았다.
“국제관계의 향후 추세는 글로벌라이제이션으로 갈 것이 분명하다. 진행속도도 생각보다 훨씬 빠를 것인데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제무대에서 비교우위에 설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해야만 할 것이다.” 최종현 회장이 1991년 아시아소사이어티 초청 연설에서 남긴 말이다. 재계 관계자는 "세계화의 개념조차 생소했던 당시, 시장의 힘이 국가의 경제를 넘어 세계를 통한 시킬 것이라는 선견지명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했다.
재계에서는 최종현 회장이 단순히 돈 버는 사업 보다는 대한민국이 앞으로 먹고 살 산업을 발굴하고 키우는데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작은 직물공장에서 출발한 SK가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통해 세계 수준의 에너지∙화학 기업으로 거듭난 것도 최종현 회장의 이 같은 추진력 때문에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최종현 회장이 1973년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추진하겠다는 비전을 밝혔을 때 주변에서는 허황된 꿈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최종현 회장은 차근차근 준비했다. 1973년 선경석유를 설립한 뒤 일본 이토추상사와 함께 정유공장을 설립키로 하고,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원유공급을 약속받았다. 정부로부터는 정유공장 설립 허가를 받기까지 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오일쇼크로 무산됐고 관련 글로벌 합작사업들도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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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최종현 회장이 1981년 초 내한한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오른쪽에서 두번째)과 담소를 나누는 장면. /사진=SK제공 |
그럼에도 최종현 회장은 장기적 안목으로 중동과 석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주력했고 결국 2차 오일쇼크 때 우리나라가 에너지 위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지원을 받는데 성공했다. 최종현 회장이 당시 대한석유공사(유공) 합작사인 걸프의 철수를 사전에 예상하고 걸프 보유 지분 인수를 위해 직접 TF를 맡아 유공의 1대 주주가 된 일은 이미 유명하다. SK 관계자는 "원유 확보와 중동 오일머니 유치 측면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고 말했다.
에너지∙화학 사업 진출 이후에는 차세대 먹거리 사업으로 정보통신업을 택했다. 선진 산업동향을 분석하기 위해 1984년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설립했던 최종현 회장은 가까운 미래에 정보통신 분야가 핵심성장 동력이 될 것임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후 최종현 회장은 미국 현지 이동통신사에 직접 투자를 하거나 이통사에 직원을 파견, 실제 근무를 하는 방식으로 통신시장 동향을 파악하고 정보통신 경영 노하우를 축적해 나갔다. 1990년에는 미국 IT업체와 합작, 선경텔레콤을 설립하면서 정보통신산업 진출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이 같은 철저한 준비로 1992년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 당시 2위와 압도적인 격차로 사업권을 획득했지만 특혜시비에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최종현 회장은 정보통신 사업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2년 뒤인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했다. 이후 SK텔레콤은 국내 기술을 넘어 1996년 CDMA 상용화 등 세계 최초 신화를 쏟아냈고 ICT코리아로서 국가 위상을 높였다.
한국이 산유국 대열에 오른 것도 최종현 회장의 공이 컸다. 그는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를 경험하면서 석유개발을 추진했는데 당시 거액의 비용이 들어갔지만 실패가 계속 됐다. 헬기로만 접근할 수 있는 미얀마 밀림에서 5600만 달러를 투자해 석유탐사를 나섰다가 빈손으로 철수한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최종현 회장은 “석유개발은 한두 해에 이뤄지는 것이 아닌 만큼 실패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면서 담당자들을 북돋았다. 이후 SK는 9개국 13개 광구에서 일평균 5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4개의 LNG 프로젝트를 일구며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이뤄냈다.
최종현 회장은 1970년대 ‘21세기 일등국가론’을 제시하면서 “21세기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SK는 세계 100대 기업이 될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최종현 회장의 기업관이자 국가관인 사업보국(事業報國), 기술보국(技術報國), 자원부국(資源富國)에는 사업과 기술로 나라에 보답하고, 자원을 확보해 나라를 잘 살게 만드는 것을 소명으로 여겼던 고인의 삶이 담겨있다.
재계 관계자는 “최종현 회장은 한 기업의 리더이자 경제인의 리더로서 모두가 위험하다고 리스크를 강조하는 상황에서 신사업 개척에 대한 의지 하나로 기업의 성장을 국가적 성장으로 이어지도록 한 장본인”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최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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