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화주의, 위정척사에 이은 민족 나르시즘이 '국뽕'
이게 남북이 손잡은 반(反)외세주의로 뻗어가면 큰일
   
▲ 조우석 언론인
지난주 글 '국뽕의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에서 민족-민중-민주지상주의를 앞세운 병적인 국사학을 국뽕사학이라고 지칭했다. 차제에 개념을 좀 더 분명히 하고 싶은데, 그건 역사 부풀리기와 구분된다. 국가 찬양, 애국심 고취란 어느 나라에도 있는 것이지만 국뽕사학은 종류가 다르다.

국뽕사학은 '우리민족끼리'란 구호에서 보듯 사상-이념이 다른 남과 북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하며 현실정치의 기능마저 갖고 있다. 물론 20여 년 전 우르과이라운드 이후 유행했던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신토불이식 자기만족에서 엄청 진화했다. 그런 자기만족은 북한에도 존재한다. "세상에 부러움 없어라!"란 구호가 그것이다.

"세상에 부러움 없어라!"란 구호가 짙은 자기열등감을 감춘 억지춘향이라면,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는 철부지 자폐주의다. 둘 다 민족 나르시즘의 변종인데, 그건 조선조 내내 소중화 타령, 구한말 위정척사 운동 이후 현재의 우리민족끼리 구호에서 보듯 한반도 역사의 유구한 상수(常數)다.

   
▲ 원로 역사학자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정년퇴임을 하루 앞둔 2009년 2월 26일 조선일보와 한 인터뷰. /사진= 2009년 2월 26일자 조선일보 1면 캡처
"우리 것은 좋은 것!"  "세상에 부러움 없어라!"

둘은 요즘 부쩍 탄력을 받고 있는 중인데, 북한의 "세상에 부러움 없어라!"는 핵과 대륙간탄도탄으로 무장해 대한민국-미국을 포함한 외부 세계에 공격적 이빨을 드러내는 단계로 발돋움했다. 한반도 남쪽의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역시 지난 20년 자기만족 단계를 넘어 반일-반미의 날카로운 죽창으로 발전했다.

이런 변화는 남북한 좌익의 콘트롤타워인 평양의 '보이지 않는 손'이 알게 모르게 작용한 결과물이란 걸 잊으면 안 된다. 반(反)외세 타령에 남한 좌익운동권-국사학-TV드라마-영화는 하도급을 받았고, 그 위에 북한이 있다는 얘기다. 안 그러곤 지금의 미친바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 싸구려 민족주의는 지금 어찌해볼 수 없는 차원의 시민종교로 커졌는데, 그 상징이 지난해 영화 '군함도'에서 배우 송중기가 "너의 반민족 행위를 조선의 이름으로 처단한다!"고 외치는 대목이다. 두 번 거푸 등장하는 그 대목에서 나는 몸서리를 쳤다. "저게 어떤 재앙을 낳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남북의 국뽕은 힘이 셀뿐더러, 거대한 블랙홀이다. 모든 걸 빨아들여 몸집을 키운다. 일테면 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이태진의 논리가 그러하다. 그는 정년퇴임하던 9년 전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당시 1면 머리기사에서 "좌편향 교과서 비판 못한 역사학계 책임 통감한다"고 고백했다.(1면 머리 제목 그대로를 인용했음.)

민중사학자들은 "역사학을 너무 정치화했다"고 당시 그는 개탄했고, 가장 좌편향화된 금성사 역사교과서를 "선을 넘었다"고 규정했다. 그 직후 그는 국사편찬위원장에도 임명됐다. 그렇다면 민중사학의 물결로부터 국사학을 보호하는 게 그의 임무인데, 이태진은 뭘 했지? 엉뚱한 짓만 골라서 했다.

그는 몇 해 전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헌법가치 훼손"이라며 반대하는 성명서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다. 민중사학자들에 이용당한 것이다. 처신만 그런 게 아니라 조선시대-대한제국 시대를 해석해온 그의 각종 '국뽕의 논리'는 민중사학의 불쏘시개 깜으로 썩 요긴하다.

일테면 이태진은 조선조 당쟁이란 상호견제의 균형이며 일종의 현대식 정당정치라고 주장해왔다. 대한제국 포장의 달인이라서 고종을 근대화를 추진한 개명군주라며 주장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국뽕스러운 과장'의 끝판왕이 이태진인데, 그런데 그런 논리, 그런 책이 이미 우리에게 어딘가 이미 친숙하지 않던가? 그게 바로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펼쳐지는 배경이다.

그 드라마 방영 이후 대한제국을 "신문물을 받아들여 세계 속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근대국가의 출발점"으로 보는 게 국민상식이 됐는데, 그렇다면 민중사학을 비판하던 이태진이 국뽕사학에 먹잇감을 제공했던 바보란 얘기인가? 내 말은 이태진이 특별히 사악한 사람이란 지적이 아니다.

맹렬한 힘으로 모든 걸 빨아들이는 국뽕사학의 에너지가 그만큼 엄청나다는 뜻이다. 온 세상이 민족-민중-민주 지상주의라는 1980년대식 운동권 마인드로 오염된 탓에 이제 국뽕사학이 나아갈 길에 거칠 것이 없어진 국면이 지금인데, 그럼 앞으로 어찌 될까? '국뽕의 꽃'은 대한제국 포장은 물론 고대사를 포함한 한국사 전체로 확장될 것이다.

   
▲ 영화 '군함도' 스틸 컷.

한국은 괴상한 '정신 승리'의 나라

예견하지만, 그게 21세기 한국인을 위로해주고 또 망가뜨리는 이중의 역할을 할 것이다. 물론 보편사와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21세기 한국인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보여주는 비참한 증거물로 끝내 남을 것이다. '미스터 션샤인'의 경우 국내에서 회수가 쉽지 않은 430억 원의 큰 제작비를 들였다. 그래서 글로벌 콘텐츠를 지향한다면서 해외시장을 기웃거린다.

실제로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에 판매돼 미국·일본·유럽·남미 등에도 공개되고 있다는 것인데, 길면 꼬리가 밟힌다. 역사 실패의 비참한 얘기를 그렇게 황당한 민족 나르시즘으로 포장하면 남들이 비웃지 않을까? "한국은 정신승리의 대국"이라고 치켜세울 때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아니 그 이상이다. 유감스럽게도 그게 학술상의 담론에 그치지 않고 정치사회의 현실에 개입하는 힘으로 커질까봐 나는 두렵다. 즉 그게 한국인 모두의 집단무의식을 지배하고, 정치의식까지 망가뜨릴 것이다. 이를테면 단군릉을 발굴해 조선민족의 원형을 말하는 평양의 전체주의 돼지들과 우리 사이의 사상-이념의 차이는 무시된다. 삽시간에 반외세 정서 속에 하나가 된다.

그래서 북핵은 내버려둔 채 엉뚱하게도 미국-일본과 각을 세울 경우 어떻게 될까?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지금이다. '국뽕의 꽃'이 남과 북에 동시에 피어나 한반도를 덮기 직전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까운 건 북한의 국뽕은 자기 체제 보위를 위한 명분이라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국뽕은 그저 덩달아 추는 깨춤이라는 점이다. /조우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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