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박유진 기자] 지난 13일 오전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엔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기상청에 따르면 그날 서울의 최고 적설량은 1.7cm. 대설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러운 눈 소식에 거리는 제설작업에 나선 건물 관리인들로 부산스러움이 느껴졌다. 시야를 확보하기가 어려울 만큼 눈보라가 휘몰아쳐 건물들의 옥외 간판을 보기가 힘들었다.

"대부업체가 가장 많이 몰려있는 빌딩이 어딘지 아세요?" 퀵서비스배달 일을 하고 있는 한 남성에게 다가가 인근 대부업체를 수소문한 결과 A건물을 추천받았다. 남성이 알려준 곳은 선릉역 초역세권 고층 빌딩이었다.

   
▲ 선릉역 인근에는 대부업체들이 입점해 있는 건물들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사진=미디어펜


오피스텔 동과 사무실 동으로 나눠진 건물의 옥외 간판에는 러시앤캐시와 산와머니와 같은 대형 대부업체는 보이지 않았다. 빌딩 내부를 들어가 층별 안내도를 살펴봤지만 그곳에서도 대부업체로 보일 만한 상호는 없었다.

'잘못 왔나'하는 생각에 빌딩을 나와 제설 작업 중인 관리원에게 '이 건물에 대부업체 사무실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냉담한 목소리로 "여기엔 그런 거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순간 '퀵서비스배달 남성이 착각했거나 폐업했거나 둘 중 하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대부업계는 몇년간 꾸준히 내려간 법정최고금리때문에 점포를 축소하거나 폐업을 선언하고 있다.

금융위원회의 대부업 실태조사 집계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금융위원회와 각 지방자치단체 등에 등록된 대부업체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해 2007년 1만8197개에서 2017년 8084개로 56%인 1만113개가 줄어든 상태다.

하는 수 없이 인근 저축은행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원하는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날씨 탓인지 점포 내에는 고객이 단 한 명 뿐이었다.

간신히 은행에서 상담을 받고 나오는 60대 여성을 쫓아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고금리 특판 예금에 가입하려고 온 것"이라며 취재를 거부했다.

   
▲ 선릉역 인근에 있는 제2금융권 OK저축은행 지점의 모습/사진=미디어펜


"아마 (대부업체 실제 이용자)인터뷰는 못 할 거에요. 그런 분들은 생계로 바쁘기도 하고 심적으로도 고통이 커서 언론사에 협조적이지 않아요. 저희도 찾아보긴 하겠는데 사례금을 요구할 수도 있어요"

마감이 급해 서울시청, 금융감독원,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 등에 협조 요청을 진행했다. 대부분은 부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개인정보보호 문제와도 직결되는 건이라 섭외가 어렵다는 입장이다.

곰곰이 고민해보니 '인터넷이나 전화로 대출을 받지 굳이 대부업체까지 찾아와 상담할 사람이 있겠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전략을 바꿔 대부업자를 직접 만나 취재하기로 했다.

각 구청 홈페이지에는 합법적인 등록 대부업체에 한해 영업 중인 대부업체의 정보를 공시하고 있다. 강남구청 공시를 통해 대부업체가 가장 많은 빌딩을 살펴보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퀵서비스배달 남성이 말했던 A빌딩에만 4곳의 대부업체가 6곳의 실에서 사무실을 차린 뒤 영업 중이었기 때문이다.

   
▲ 대형 대부업체를 제외한 중·소형 업체들은 보통 임대료가 저렴한 오피스텔에 사무소를 차려놓고 영업 중이다./사진=미디어펜


A빌딩을 다시 찾았다. 주소에 적힌 대로 4층에 올라가자 평범한 오피스텔 복도 풍경이 펼쳐졌다. 현판도 없이 문이 굳게 닫힌 철문에선 영업 중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벨을 눌러도 누구 하나 인기척이 없어 결국 발길을 돌려야 했다.

비교적 합법적인 느낌의 사무실을 갖춘 D업체를 찾았다. 내부에선 추심업무를 하는지 큰소리를 내는 남성의 목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벨을 누르자 흔쾌히도 D업체 관계자는 문을 열어줬다. 조심스레 들어선 사무실에서 관계자에게 인사를 건넨 뒤 취재 요청을 했지만 그는 단박에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잠시 목격한 사무실 내 풍경은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남성 2명이 컴퓨터를 업무를 보고 1명은 바쁘게 전화를 하는 식이었다.

마지막 F업체를 찾았을 때 운이 좋게도 대부업체를 찾아온 한 남성과 마주쳤다. 정장 코트 차림에 겨울 머플러까지 세련되게 차려입은 그는 사금융을 이용하려는 이들과는 언뜻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곳까지 무슨 일로 왔냐고 묻자 그는 자신을 친환경농산물 법인사업자로 소개했다. 경기도 광주에서 사업을 하는 그는 최근 영업이 급격히 악화돼 가지고 있는 토지가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개평좀 하려고 왔어. 가지고 있는 땅 가지고 사채로 돈 좀 빌려 쓰려고. 정부에서 부동산 대출 자금줄을 다 틀어막으니까 시중은행에선 대출이 안된대. 지점장이랑 대출 상담까지 받았는데 정책 때문에 안된대. 요즘엔 경기도 안 좋아서 판로개척도 안 되고 급하긴 급하니 여기까지 왔어."

도매상을 상대로 친환경농산물을 대량 납품한다는 그는 여기 오기 전 시중은행과 저축은행의 문도 두드렸지만 대출을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는 "오기 직전 시중은행에도 여럿 들렸는데 하나같이 정책 때문에 내년 상반기 전에는 대출이 안된대. 가진 게 땅밖에 없는 우리같은 사람들은 달리 돈 구할데도 없고, 아는 후배 소개로 찾았는데 여기도 은행만큼 까탈스러워서 서류 떼는 것도 은근히 복잡하다니까"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대출 조건을 묻는 말에 "3~4억 정도 빌릴 예정"이라고 답변한 뒤 "이자와 근저당비용 등을 제외하면 선수수료로 6%를 떼가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대부업체는 돈을 빌릴 때 채무자로부터 중개 수수료를 받아선 안된다.

그는 수수료 편취가 불법이라는 것을 아냐는 물음에 "불법이든 뭐든 당장 돈이 급하니 여기라도 오게 된 것"이라며 "은행에서 대출길이 막힌 우리같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불법 사채업자들이 고마운 존재"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금융 기자로 일하며 정부의 '서민금융' 정책을 취재하던 것들이 생각났다.

정부는 최근 가계부채를 줄이는 대신 서민과 중소기업 등을 위해 중·저신용자를 위한 대출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새희망홀씨대출과 안전망대출, SOHO대출 등이 대표적이다.

그에게 그런 상품이나 서민금융클리닉센터 등을 추천할까 고민했지만 생각을 거두었다. 오죽하면 여기까지 왔겠는가.

   
▲ 선릉역 인근에 있는 시중은행 점포에선 서민금융의 대표 상품인 '새희망홀씨대출' 광고물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사진=미디어펜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빌딩을 나왔다. 지하상가로 통하는 입구에서 대부업자로 추정되는 남성과 마주쳤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 소통이 잘 안되는지 큰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니, 부동산에선 1%고, 0.9%는 무슨, 내가 이 짓 한 두번 해봐"라며 통화를 하는 그를 뒤따라 지하상가로 내려갔다.

그는 지하상가 구석에 있는 작은 커피숍에 들어갔는데, 그곳은 일종의 대부업자들이 머무르는 아지트로 추정됐다. 커피숍에 있는 작은 방에선 대부업자들로 보이는 이들이 여러명 모여 서류더미를 뒤적이거나 누군가와 바쁘게 통화 중이었다.

   


상가에서 점포를 운영하는 한 자영업자를 찾아갔다. 그에게 이 빌딩에 유독 대부업체가 많은 이유와 대부업체 관계자들을 본 적 있냐는 물음을 건넸다.

그는 "있다고 얘기만 들었지 어디서 영업하는지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어 대부업체나 불법 일수 등을 이용하는 자영업자를 아냐고 묻자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답변했다. "아이고, 큰일 나려고. 그 사람들은 앞뒤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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