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 복지포퓰리즘과 같은 정부개입주의 처방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취업하고 싶은 직장 1위로 공기업이 꼽히고, 공공성이라는 말이 아름다운 말로 여겨지며, 무슨 일만 생기면 정부가 나서 해결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대세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부각시키면서 부자와 기업에 대한 반감을 고취시키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같은 사회 풍조에 대해 경계하면서 시장경제-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 번영에 기여한 시장경제-자유민주주의를 호의적으로 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바로 ‘자유주의’ 운동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자유주의에 약육강식, 승자독식, 부패와 탐욕이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덧씌워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고 퍼져나가면서 그 입지는 더욱 위축되었지만, 그러한 현실에서도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자유주의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학생과 대중들에게 쉽게 알리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유경제원’과 ‘미디어펜’은 그 노력의 일환으로 젊은 자유주의자들의 이야기인 <청춘, 자유주의의 날개를 달다>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자유경제원에서 최근 펴낸 젊은이들의 이야기입니다. 8월 5일 저녁 7시, 서울역 상상캔버스에서 북콘서트도 열립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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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미 컨슈머워치 사무국장 |
1997년
1997년 전북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IMF로 회자되는 그 해는 우리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시점이었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6년 연세대 사태로 한국대학생총연합회(한총련)로 대표되는 북한추종주의(NL계열) 학생운동이 급속히 추락하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전북대에서는 한총련에 비판적인 새로운 학생운동그룹이 학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북한의 대규모 아사사태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고, 1997년 2월 북한노동당 비서였던 故황장엽 선생이 망명해 북한의 폭정을 폭로했다. 전북대에서는 새로운 학생운동 흐름으로 북한민주화운동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1997년 말 터진 외환위기는 우리사회의 체질 개선을 요구했다. 공기업의 민영화, 규제완화 등 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대안들이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해 제시됐다.
전북대 학생 운동권은 기존의 계급주의와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탈피해 자유주의적 사회발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문명사적 입장에서 역사를 접근하고 한국 현대사에 대해서도 기존의 외세 의존 형 독재국가라는 시각과 결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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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 자유주의의 날개를 달다’ 북콘서트 |
시사교양지 바이트
대학생활을 지배했던 것은 전공 공부가 아니라 북한민주화로 상징되는 새로운 학생운동이었다. 대학 졸업 후 일자리도 북한민주화네트워크라는 NGO에서 얻게 됐다.
대학생들에게 북한인권 실상을 알리고 동참을 이끌어내는 것이 나의 업무였다. 이 일은 쉽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만 사회문제에 대학생들의 관심은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대학생들을 만난다면 그들은 대부분 좌파였다.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증오의 시각을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2005년 8월, ‘세계화에 대한 지지’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관심’ ‘자유주의 개혁의 필요성’을 대학사회에 알리겠다는 포부(?)로 대학생 시사교양지 ‘바이트’를 창간했다. 그리고 2012년 8월까지 바이트를 운영했다. 8년간 바이트를 운영하면서 여러 자유주의 스승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나를 지적으로 자극했고, 묘하게 그 자극이 좋아서 자유주의 사상 ‘언저리’에서 지금도 지내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를 ‘자유주의’로 이끈 책과 스승과의 만남을 소개하고자 한다.
자유주의 입문 서적 『보이지 않는 마음』
2005년 친구로부터 책 한권을 소개받았다. 『보이지 않는 마음』 - ‘MIT 경제학 교과서’라는 설명이 붙은 이 책은 미국의 한 사립 고등학교의 경제학교사 샘과 문학교사 로라의 사랑이야기이다. 샘은 자본주의 체제 신봉자이고 로라는 시장보다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이 둘은 거리의 부랑아를 돕는 일부터, 다국적 기업의 아동노동착취(?)까지 모든 사회정책을 놓고 논쟁을 버리다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된다.
‘시대정신’이라는 잡지에 이 책의 서평을 쓰게 됐다. 나는 샘의 모든 주장들이 중요해 보여 서평에 다 담으려 했다. 그러나 지면의 제약으로 내용을 줄이고 줄여야 했다. 읽고 또 읽었다. 한 다섯 번을 읽은 것 같다. 그러고 나니 샘이 하고 싶은 말이 한마디로 요약됐다.
“인간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정부의 보호가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질 때 우리의 삶이 의미 있지 않겠어요?”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샘이 하고 싶은 말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의 가치였다. 아마 이때부터인 것 같다. 현실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만 알고 있던 자유주의가 내 인생의 가치관이 된 것이다.
“너희들은 글쓰기의 기본을 몰라” 독설가 정규재 실장님과의 만남
자유주의를 삶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였지만 나는 여전히 자유주의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사회문제를 대할 때 더욱 그랬다. 그런 나에게 자유주의의 중요한 핵심 논리를 가르쳐준 분이 있었다. 바로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논설실장님이다.
2008년 5월 바이트 대학생 기자학교를 열면서, 정규재 실장(당시에는 논설위원)님을 강연자로 섭외했다. 내가 왜 그를 섭외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한경으로 전화를 걸어 그에게 강연을 부탁했다. 그는 바이트가 어떤 곳인지 자세히 묻지도 않고 흔쾌히 강연을 승낙했다. 그리고 ‘촛불과 정치미학’을 주제로 칼럼을 써오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강연 당일, 좀 무서운 인상의 머리가 하얀 한 신사분이 강연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학생들이 쓴 글을 휙 던지면서 “이런 것도 글이라고 써와서 나같이 바쁜 사람에게 그것도 공짜로 강연을 부탁해”라고 일갈했다. 나는 경악했다. ‘아, 망했다. 내가 왜 이 분을 섭외했을까….’ 급 후회가 밀려왔다. 그의 독설은 이어졌다. “내가 언제 광우병 촛불 집회에 대해 써오라고 했나. 나는 ‘촛불과 정치미학’에 대해 써오라고 했다. 너희들은 ‘정치미학’의 뜻도 모른다.”
광우병 집회가 한창이던 당시 학생들은 ‘촛불과 정치미학’이라는 주제에 대해 하나같이 ‘광우병 촛불집회에 대한 찬반 입장으로 글을 써온 것이다.
“주위의 고요한 정적 속에 촛불을 든 사람은 스스로가 마치 어두운 사회의 악에 대항하는 마지막 선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동시에 숭고한 아름다움에 자기가 동참하고 있다는 감정의 고양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순간에는 어떤 논리적 설명도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정치미학’이다. 광우병 촛불집회를 좌파들이 정치미학으로 대중을 선동한 대표적인 퍼포먼스다. 이런 정치미학을 가장 잘 활용했던 자가 ‘히틀러’와 ‘마오쩌둥’이다.….”
그의 강연은 ‘거리의 함성이 민주주의의 원동력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각 개인의 내밀한 선택과 판단이 종합되는 그런 체제’라는 설명으로 끝을 맺었다. 물론 글쓰기에 대한 노하우도 제시했다. “일 년에 책 300권을 읽어라. 단어는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강연이 끝난 후 학생기자들의 반응은 반으로 갈렸다. ‘최고다.’ ‘최악이다.’ 나에게는 최고였다. 나는 그 후 계속 그에게 바이트 기자학교 강연을 부탁했다. 그리고 정규재 실장님은 기자가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글쓰기 스킬’이 아니라 ‘사고력’이라며 논술교육을 제안했고 2년간 직접 강의해주셨다.
‘정의를 둘러싼 논쟁들’ ‘환경과 과학’ ‘민주주의의 이면’ ‘세계화와 민족주의’ ‘상대주의와 보편주의’ 등 우리 사회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들을 정리하고 좌우의 가치가 어디서 대립하는지 보여주는 수업이었다. ‘자유주의자가 되고 싶어도 너무 어렵다’는 나의 질문에, 그는 “자유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다. 그건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된다. 그 나이 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복잡하게 바라보고 사고를 깊이 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맞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주의자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사색하고 세상을 복잡하게 바라보려는 노력, 한마디로 ‘공부’가 필요했다. 공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따뜻한 사람, 복거일 선생님과의 만남
2004년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를 읽었다. 복거일과의 첫 만남이었다. ‘세상이 버린 사람들을 거두는 것’이 작가라며 ‘친일파’를 변호하는 이 책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당시 나는 한국해양전략연구소에서 개최하는 월례 강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강연자를 참가자들로부터 추천받겠다고 했다. 나는 주저 없이『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와 복거일 작가를 추천했고 나의 추천은 받아들여졌다.
선생님의 강연은 열띤 논쟁으로 번졌다. 참가자들은 다양한 질문을 쏟아냈고 선생님은 거기에 막힘없이 답변을 했다. 강연장 분위기는 차츰 그의 주장에 동의하기 힘들더라도, ‘저 사람이 친일파라 저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물론 선생님의 주장에 전적으로 수긍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연이 끝난 후, 복거일 선생님이 나를 찾았다.
“누가 나를 추천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그 분에게 책을 선물하려고 하는데 누구인가요?”
“아, 저입니다.”
나는 그에게 그의 데뷔작 『비명을 찾아서』를 받았다. 나는 그것을 연으로 계속 선생님을 괴롭혔다. 바이트 글쓰기 학교 강연을 부탁드리고, 영어공용화를 주제로 강연회도 열었다.
2010년 복거일 선생님의 팬인 한 친구 덕택으로 선생님의 집을 방문하게 됐다. 막상 선생님 댁을 방문하려니,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과 에세이집을 탐독했다. 그 중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덤 앞에서」라는 글을 읽고 나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내가 올 때마다 찾아보는 무덤은 1987년 ‘6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대전에서 시위를 막다가 시위대가 몬 버스에 치어 죽은 전경이 묻힌 곳이다. … 큰일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 비록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세월을 기다릴 수 있다. 자신들의 삶을 마침내 정당화시켜줄 세월을.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여러 번 바뀌더라도, 그 전경의 죽음에 뜻을 부여할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기다릴 수 있는 것은 그저 잊혀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남이 슬퍼해주기를 바라지 않는 그 무덤 앞에 서면, 마음을 비우게 되고 그 빈자리를 맑아서 거의 빛깔이 없는 슬픔이 채우고 그 슬픔이 다시 마음을 씻어 더욱 비게 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전경의 무덤을 살피는 그의 시선이 너무도 놀라웠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냉철한 논리의 소유자로만 알던 그의 글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의 기본자세는 너그러움이고 소수에 대한 배려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단편 소설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내가 느낀 복거일 선생님의 따뜻함을 대신하고자 한다. 2005년 한 시사주간지에 기고한 ‘왜 면접을 영어로 보는 거죠’라는 단편소설은, 2020년의 영어 격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달동네 할머니 밑에서 자란 주인공은 영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당연히 그가 고를 수 있는 직업은 제한적이었고, 그것마저도 영어로 면접을 봐 번번이 낙방했다. 한국말로는 자신에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 영어로 답하려니 머리가 멍해진 주인공은 한 면접장에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왜 면접을 영어로 보는 거죠, 자랑스러운 우리말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항의한다. 나중에 그의 항의에 대해 들은 사장은 자기소개서에 기록된 성장 배경을 보고 그녀에게 입사 기회를 준다. 단 조건은 회사에서 비용을 댈 테니, 열심히 영어를 배우는 것이다. 미국 지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영어 공용화’의 필요성에 대해 복거일은 이렇게 말한다. ‘영어 격차라 불리는 현상에 대한 근본적 대책이다. 영어는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생존에 필수적 기술이 되었고, 모두 자식들의 영어 습득에 크게 투자한다. 안타깝게도, 가난한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좋은 영어 교육을 마련해줄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가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게 된다. 영어 공용은 사회적 투자를 통해서 우리 어린이들이 영어를 한국어와 함께 어릴 적에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것이다. 영어를 통한 가난과 부의 세습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실질적 조치다.’
자유주의, 삶을 대하는 태도
나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자세, 사회문제를 복잡하게 바라보려는 태도 그리고 너그러움. 이것 내가 지금까지 배운 자유주의의 핵심 내용이다. 자유주의는 삶을 대하는 철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나와 우리 사회를 좀 더 괜찮은 곳으로 바꿔나가는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 나의 스승과 같은 그런 너그러움을 지니고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히 꾸려가다 보면, 그런 날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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