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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원 객원칼럼니스트 |
1980년 7월 19일부터 8월 3일까지 옛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2회 하계 올림픽에 임원진으로 다녀온 아버지는 희한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모스크바는 밤 11시가 돼도 밝은 대낮이고, 새벽 3시에 해가 뜬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두꺼운 브래태니커 백과사전이라도 뒤지지 않으면 안 되던 시절이라 중학생 입장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는 공상과학 같은 것이었다.
1986년 개봉한 영화 '백야'는, 소련 출신의 세계적인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환상적인 발레 연기를 선보이며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미국으로 망명한 세계적인 발레리노가 비행기 불시착으로 다시 소련의 억압에 들어가고, 죽을 고생을 해서 다시 소련을 탈출한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소련을 '백야의 나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이즈음부터다.
밤이 돼도 해가 지지 않는 '하얀 밤(White night)'은 생소한 자연현상이었다. 계절에 따라 낮과 밤의 길이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예 해가 지지 않는 밝은 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몰라도 실제로는 이해하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백야'는 '위도 약 48도 이상의 고위도 지방에서 한여름에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현상(출처 두산 백과)'을 말한다.
옛 소련, 지금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북위 55도 이상에 위치한 스웨덴은 바로 그 '백야'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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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웨덴 기상청은 일기 예보. 왼쪽이 스톡홀름 날씨이고 오른쪽은 키루나의 날씨다. /사진=스웨덴 기상청 홈페이지 캡처 |
스웨덴은 남북으로 국토의 길이가 1570km, 최북단이 북위 69도이고, 최남단이 북위 55.5도다. 강원도 고성(북위 38.5도)에서 제주 서귀포(북위 33.2도)까지가 620km인 것을 참고한다면 스웨덴이 얼마나 긴 위도에 걸쳐져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스웨덴의 여름인 6, 7, 8월이 찬란한 태양의 축제인 것은 백야 때문이다. 하지가 막 지난 6월 말 현재 스톡홀름을 기준으로 아침 해 뜨는 시간은 새벽 3시 30분, 해지는 시간은 저녁 10시 10분이다.
북위 67도에 자리해 북극권(북위 66도 이북)에 속하는 북쪽 도시 키루나(Kiruna)는 진정한 의미의 '백야'다. 스웨덴 기상청(SMHI)의 일출 일몰 시간표(Soltider)에 'Midnattssol(미드나츠솔)' 직역하면 '해가 있는 한밤'으로 표시돼 있다.
이때부터 3개월 이상 카루나 등 스웨덴의 북쪽은 해가 지지 않는다. 서쪽으로 기울던 해는 지평선(또는 수평선) 위에서 평행으로 이동하다가 사라지지 않고 다시 떠오른다. 스웨덴의 6, 7, 8월은 건기이고 새파란 하늘에는 극단적으로 빛나는 태양뿐이다. 워낙 습도가 낮다보니 찜통더위는 없어도 햇볕은 말할 수 없이 강렬하다.
스웨덴의 하늘이 찬란하게 빛나면 스웨덴 사람들은 모두 집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호숫가 바위나 짙푸른 초원은 물론 도심의 카페와 술집의 바깥자리며, 하다못해 거리의 벤치와 건물의 계단에도 몰려있다. 이미 집 발코니 뙤약볕 아래서 그릴을 꺼내 고기를 굽고, 훌훌 옷을 벗어던진 채 손에는 맥주를 들고 태양을 만끽한다.
아무리 뙤약볕이라도 그늘을 찾는 이들은 별로 없다. 어느 공원의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는 한국 사람을 비롯한 아시아 사람일 것이다. 스웨덴 사람들은 그늘을 피해 햇빛을 찾는다.
6, 7, 8월에 스웨덴 사람들이 집착적으로 태양을 찾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 가을과 겨울과 봄을 이어온 긴 어둠과 흐린 날씨 때문이다. '백야'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극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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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톡홀름 시청사가 건너다보이는 이바르 로스 공원(Ivar Los Park). 여름이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이 태양을 맞기 위해 모이는 대표적인 곳이다. /사진=이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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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톡홀름 인근 시그투나라는 오래된 마을의 호숫가 공원. 가족이 함께 나와 불밭에서 태양을 만끽하고 있다. /사진=이석원 |
키루나는 9월 20일 경인 추분부터 다음 해 3월 20일 경인 춘분까지 거의 종일 밤이다. 이 시기 오전 11시가 넘어야 해가 뜨고, 오후 2시면 해가 지는 날이 많다. 세 시간 쯤 해가 떠 있다고는 하지만 낮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흐린 날이 부지기수라 어슴푸레 하다. 특히 11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 3개월 동안은 아예 해가 뜨지 않는 '극야(Polar night)'다.
스톡홀름의 경우도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북위 59도인 스톡홀름은 북극권은 아니지만, 12월에는 보통 오전 9시가 돼야 해가 뜨고, 오후 3시 30분이면 해가 진다. 마찬가지로 흐린 날이 많아 그나마 해가 떠 있는 시간에도 해를 보기는 쉽지 않다. 일조량이 절대 부족한 상황인 것이다.
일조량은 비타민의 자연 섭취와 직결한다. 비타민이 부족한 사람의 경우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복지 국가라고 불리는 스웨덴에서 과거 한국 보다 자살률이 높았던 것, 유럽 최고의 우울증 발병률 국가인 것이 바로 그 태양 때문이다. 6, 7, 8월을 뺀 나머지 9개월의 상당부분 태양을 접하지 못하고 사는 환경 때문이다.
스웨덴 사람들은 별로 축복받지 못한 자연 환경 속에서도 가급적이면 밝고 친절하다. 그런 극단적인 자연 환경 조차 신에게서 받은 축복으로 생각하고, 그 축복을 즐기려고 애쓴다. 과거 자살하는, 하려는 사람도 많았고, 우울증이 범람한 탓에 길에서 이상행동을 보이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래도 스웨덴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고가 보편적이다.
그래서일까? 예년보다 훨씬 태양의 축복이 빨리 찾아온 스웨덴의 거리는 사람도, 자연도 밝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해가 지지 않는 황홀함 아래서 맥주 한 잔 움켜쥐고 충분히 웃는다. 이 여름을 지나고 나서 찾아오는 긴 어둠의 시간에도 행복하려고. /이석원 객원칼럼니스트
[이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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