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정치권 '전쟁' 아닌 외교력으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응책 찾아야
이순신 장군의 12척, 죽창가, 의병, 국채보상운동…. 일본의 수출규제에 당정청이 쏟아낸 말들이다. 문재인 대통령, 조국 민정수석, 최재성 더불어민주당 의원(당 일본경제보복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 등이 주인공이다.

한·일 갈등의 본질을 꿰뚫는 전략적 대응 대신 시대착오적인 반일감성팔이가 넘쳐나고 있다. 16일 당청회의에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우리 국민들은 정부가 정공법으로 나아가라, 싸움은 우리가 한다며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펼치고 있다"며 "우리 국민들을 믿고 정부는 단호하게 대처해주길 바란다"고 주문했다. 국민을 볼모로 전면전이라도 펼치겠다는 우매한 생각에 기가 막힌다.

지켜보는 기업들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다. 정부가 뾰족한 정치·외교적 해법은 내놓지 못한 채 감성팔이로 전면전에 나서는 듯한 모양세다. 관제민족주의적이고 정략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애먼 기업들의 피해만 커질 것이란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나라 경제와 기업의 운명은 뒷전이다.

강제징용 협상을 위한 '제3국 중재위 구성'에 대한 일본 측 제안에 대한 한국측 답변시한인 18일은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미 우리 정부는 수용불가 입장을 밝혔다. 일본의 추가 보복은 우려가 아니라 현실화 됐다. 불을 끄는 정부와 정치권이 아니라 되레 부채질을 하고 있다. 

일본의 3대 핵심소재 애칭가스,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수출규제만으로도 공장 가동에 경고등이 켜졌다. 16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디스플레이 기업은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갔다. 일본정부가 수출 규제를 풀지 않으면 2~3개월 내 공장 가동이 불가피하다는 업계의 전망이다.

   
▲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지난 11일 국회에서 '일본 경제보복 대책 특별위원회 1차회의'를 열고 있다. /사진=더불어민주당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체들은 핵심소재 다변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롯데 현대자동차그룹과 LG그룹 등 주요그룹도 한·일 관계악화에 따른 대응책 마련에 돌입했다. 하지만 정부가 강대강으로 맞섬에 따라 전산업으로 확전될 조짐이다.

일본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급소를 친데 이어 국내 완성차업계를 겨냥한 수출 규제설이 돌고 있다. 추가제제 다음 타깃은 자동차와 기계 산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정부가 다음 달 광복절을 기점으로 전략물자 수출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빼면 국내 산업 기반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퍼펙트스톰의 공포감이 몰려오고 있다.

일본은 자율주행자동차의 핵심장비인 초정밀카메라에 들어가는 광학렌즈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수소차에 들어가는 화학소재를 쌍용자동차와 르노삼성자동차는 핵심 부품인 변속기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특수목적기계와 일반목적기계 산업의 대일의존도(전체 수입 중 일본 수입 비중)는 각각 32.3%와 18.7%였다.

지난 15일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의 경제보복에 "일본에 더 큰 피해가 갈 것임을 경고한다"는 강경입장을 밝혔다. "중대한 도전", "경고" 등 수위 높은 발언은 사실상 전면전의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정부가 정치·외교적 카드 없이 감정적으로 나가면 기업은 더 갑갑해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일본 국내총생산(GDP)는 4조9709억 달러(2017년 기준)이고 한국은 1조6194억 달러다. 세 배 차이 이게 현실이다. 지난해 한국은 일본에서 546억 달러어치를 수입했다.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수입한 규모는 305억 달러였다.

일본은 한국에서 수입하지 않더라도 대체 가능한 품목이 많다. 반면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물품 중 대체 불가능한 품목이 많다. 일본을 상대로 쓸 보복카드가 마땅찮다는 것이다. 기업이 우려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 보복이 전면전으로 치달으면 물론 양쪽 모두 피해를 보는 건 자명하다. 문제는 불편한 사실이지만 일본보다 우리가 입는 타격이 훨씬 크고 아프다는 것이다. 현실을 자각한다면 자존보다는 생존을 우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감정 분출은 일시적이지만 경제 악화는 장기적이다. 구조적인 민생 피해를 가져온다. 이념이나 명분보다는 실용과 실리를 취해야 한다. 당장 발등에 불이 붙는데 한가한 장기 대책을 논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위기 대응 후의 문제다.

국민을 부추기는 반일감성팔이는 당장 집어치워야 한다. 관제민족주의적 반일은 국가의 미래를 더욱 후퇴시킨다. 자해적인 반일은 결국 청년들의 미래마저 어둡게 한다. 정부와 정치권은 '전쟁'이 아닌 외교력으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응책을 찾아야 한다. 이대로라면 일본을 이길 수도, 국익을 지킬 수도,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도 없다.
[미디어펜=편집국]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