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해인,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서 현우 역 맡아 열연
"유년 시절 조부모님과 많은 시간 보내…옛 정서 좋아해요"
"정지우 감독 덕분에 행복했던 현장…'사람 정해인'으로 존중받았죠"
[미디어펜=이동건 기자] 2014년 드라마 '백년의 신부'로 데뷔한 뒤 '블러드', '그래, 그런 거야', '불야성', '당신이 잠든 사이에', '슬기로운 감빵생활'까지 역할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달려왔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의 연타석 흥행 홈런을 통해 멜로 장인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정작 본인은 "수십 년은 거쳐야 한 분야의 장인이 되는 건데, 조금 이상하다"며 민망해한다. '유열의 음악앨범'으로 돌아온 배우 정해인의 이야기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감독 정지우) 개봉을 앞두고 만난 정해인은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기자 앞에 나타났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종영 인터뷰에서도 같은 옷차림이었던 그는 작품뿐만 아니라 매사의 마음가짐이 진지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처럼 우연히 만난 두 사람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가 오랜 시간 엇갈리고 마주하길 반복하며 서로의 주파수를 맞춰 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

90년대 정겨운 풍경에서 바라본 정해인의 얼굴은 따스했다. 불완전하지만 아름답고, 미숙하지만 열정 가득한 그의 모습이 청춘의 자화상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격동의 밀레니엄 세대를 거친 정해인에게도 90년대는 짙은 여운으로 남아있다.

"제가 워낙 옛날 음악이나 레트로 감성을 좋아해요. 이번 촬영을 하면서도 익숙한 음악들이 많았고, 당시 노래를 들으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장필숙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이문세 '소녀', 김광진 '편지'… 이런 노래를 되게 좋아해요."

남다른 감성과 취향으로 친구들 사이에서도 애늙은이라고 불린다는 정해인. 그는 "어렸을 땐 그런 말에 공감을 못 했는데 조금씩 인정하고 있다"며 "유년 시절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밝혔다.


   
▲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의 배우 정해인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유열의 음악앨범'은 1990년대 처음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던 시절, IMF로 불안했던 청춘의 시절, 그리고 2000년 밀레니엄, 보이는 라디오 시대의 개막까지 추억 속 그 시간을 소환하며 레트로 감성을 자극한다. 여기에 정해인·김고은의 호흡과 정지우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더해져 풋풋하고 찬란한 순간들이 탄생했다.

"시작부터 이야기가 큰 울림을 주더라고요. 서정적인 느낌도 좋았고요. 대본을 보기만 해도 음악이 떠오를 정도로. 그리고 이번 작품을 하면서 감독님께서 배우 정해인이 아닌 사람 정해인으로 존중해주시는 걸 피부로 느꼈어요. 처음 감독님을 만났을 때 행복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는데, 제 확신이 맞았죠. 보통 촬영을 할 때 밥 먹는 시간, 귀가 시간을 체크하곤 하는데 그런 적이 없었어요. 촬영이 끝나면 감독님께 재밌었다고 문자도 보내고… 감독님이 신을 분석하고 연출하는 것도 버거우실 텐데 현장의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을 챙겨주셨어요. 감사했어요."

화기애애한 촬영장이었지만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다. 바로 언덕과 내리막길을 질주하는 신. 이 장면은 장장 3일 동안이나 촬영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가장 힘든 신을 뽑으라면 그 장면이에요. 평지를 뛰는 것도 힘든데 언덕과 내리막길을 뛰니까. 언덕에서는 허벅지가 터질 것 같고, 내리막길에선 무릎이 꺾일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요. '뛰다가 죽겠구나' 싶었어요.(웃음) 주저앉을 뻔한 적도 많고, 온몸이 다 아팠어요. 그래도 너무 감사했던 건 촬영장에 피지컬 팀이 있었어요. 근육도 마사지해주시고 부상 방지를 위해 도움을 주셔서 피지컬 팀에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 장면은 애절함, 처절함, 힘듦이 섞여 있는 것 같아요."


   
▲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의 배우 정해인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정해인이 연기한 현우는 순수한 미소 뒤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삶의 소소한 행복을 사랑하고 이를 붙잡으려 노력하지만, 그에게 찍힌 과거의 낙인과 주변 환경이 그를 끝없는 우울로 끌어당긴다.

"현우라는 인물에게 제가 가진 우울함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제가 마냥 밝은 줄만 아시는데 그렇진 않거든요. 누구나 기쁜 날도, 피곤한 날도, 우울한 날도 있잖아요. 저도 일을 하다 보니 번아웃이 와서…"

뜻밖의 번아웃 증후군 고백에 지금의 상태를 물었다. 번아웃 증후군이란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감과 함께 무기력해지는 현상. 정해인은 번아웃 증후군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몇 가지 방법을 찾았다"고 전했다. 그 방법은 가족과 여가 시간을 보내고 팬들과 소통하는 것.

"얼마 전 '봄밤' 종영 후 7살 터울 동생, 친한 형과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갔는데 일생에서 손꼽히는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대학생 때는 모두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제가 번 돈으로 호텔을 예약하고… 이런 게 기분이 너무 좋더라고요. 또 제 연기를 봐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에너지를 받아요. 팬카페에 자주 들어가는데, 응원글이나 편지도 남겨주시고. 번아웃이 올 때쯤 늘 팬분들께서 힘을 불어넣어 주세요."


   
▲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의 배우 정해인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정해인은 자신이 현재 청춘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라고 표현했다. 현우의 모습이 자신과 닮아 이번 작품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어린 날의 경험을 반추하는 계기도 되었다고 한다.

"제 청춘은 진행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현우라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스무 살이 되던 해, 입대하던 날, 많은 고민을 하던 군 생활 기간… 그 시기가 인물 표현에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아요. 전 캐릭터를 연기할 때 내면의 에너지를 끌어오는 경우가 있지만, 웬만해서 경험을 갖고 오진 않거든요. 제가 살아온 인생이 너무 한정적이고 많은 경험을 못 했기 때문에."

올해로 데뷔 6년 차를 맞은 정해인. '유열의 음악앨범' 크랭크업 후 바로 '봄밤' 촬영에 돌입한 그는 지난 7월 드라마 종영 후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제일 힘든 작품이었지만, 어느 작품보다도 끝난 뒤의 외로움과 공허함이 컸다"는 그에게 '현재 나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노래'에 대해 묻자 김광석 '서른 즈음에'·'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꼽았다. 

"작품이 끝날 때마다 그걸 잊어야 하니까… 그래야 새로운 걸 받아들이잖아요. 과거에 머물고 있으면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용량에 한계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걸 반복하다 보면 힘들어요. 자신감이 붙을 만하면 새로운 작품 만나고, 부딪히고, 박살 나고."

[미디어펜=이동건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