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편협한 순수주의와 신바람 광기가 특징
이어령은 철학 부재 때문에 이런 측면 이해 못해
   
▲ 조우석 언론인
토막이 문화 예찬을 펼친 문학평론가 이어령(85)을 두고 나는 지난 글에서 정면 공박했다. 한마디로 영험함을 잃은 문화 무당이란 비판이었다. 논리비약은 물론이고 갖다 붙여 만드는 식의 말장난이 너무도 공허하며, 결정적으로 철학의 부재는 심각한 수준이란 지적도 했다.

오늘은 그걸 실증해 보일 차례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의 토박이 '막 문화' 예찬은 이어령 문화론 중 최악에 속한다. 막걸리·막사발·막춤 등이 다음 세기 문명의 원천이란 주장은 실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다. 이 글로벌한 시대에 고유문화로 돌아가자는 '국뽕 선언' 자체가 터무니없기 때문인데, 그 점은 디테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막사발의 경우 일부 일본인이 극찬하고 있지만, 분업 공정이 없이 대충 만든 그릇이란 성격엔 변함없다. 그걸 옛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구수한 큰 맛'이라고 평가했지만, 한국의 으뜸가는 멋이라고 떠받들 순 없다. 정교함이 떨어지는 우리의 미숙함 내지 거친 면 때문이다.

그게 문제다. 타계한 철학자 김형효가 지적했듯 한국인 집단무의식에도 확실히 그런 요소가 들어있다. 주자학에 몰두하는 우리 특유의 근본주의적 기질이 있고 그게 순수주의를 반영한다면, 동시에 촛불 시위 등이 보여주듯이 이성과 담 쌓은 광기의 신바람이 동시에 있다. 한국인은 이 편협한 순수와, 광기의 신바람 사이를 오가는 묘한 이중성이 특징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맑음-순수-지조-절개를 동경해온 반면 좌옹(佐翁) 윤치호 지적대로 우리에겐 90%의 감성과 10%의 이성으로 사는 광기의 신바람이 동시에 존재한다. 광기의 신바람이 이어령이 말하는 토박이 문화 즉 막 문화의 실체일텐데, 어찌 그걸 대놓고 숭배할 수 있단 말인가?

깊이가 없는 이어령이 채 모르고 있는 것은 고대의 원효-의상 그리고 조선조 퇴계-율곡의 철학이란 신바람 정서를 이성화하는 작업이었다는 점이다. '약이자 독'인 집단정서를 한 차원 높이려했던 게 그들 철학이다. 그건 지금도 우리 과제다. 광우병과 탄핵 촛불집회 때 국민 전체가 폭민(暴民)으로 돌변하는 문화사적 배경에도 그게 있지 않은가.

북한의 광기란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건 독재자 김정은의 작품이지만, 실은 2000만 주민들의 기질과 정치의식 즉 한국인의 풍토에서 만들어진 괴물 정치체제가 아닐까? 확실히 우린 너무 거칠고 세련화가 덜 됐으며 그 결과 때론 광기로 치닫곤 한다. 그건 분명히 우리의 한계다.

때문에 막걸리·막사발·막춤의 막 문화란 순치되고, 세련화되어야 할 대상이지, 다음 세기 문명의 원천일 순 없다. 확실히 이어령은 문명과 문화사 전체를 보는 시야가 없으며, 책임 있는 발언을 하는 사람은 못 된다. 그가 책임 있는 원로라면 지금 무얼 해야 할까? 지난 30년 한국 사회를 지배한 원리가 민중-민족이란 걸 확인하고 그것과 씨름할 것이다.

   
▲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막걸리·막사발·막춤의 막 문화란 순치되고, 세련화되어야 할 대상이지, 다음 세기 문명의 원천일 순 없다. 확실히 이어령은 문명과 문화사 전체를 보는 시야가 없으며, 책임 있는 발언을 하는 사람은 못 된다. /사진=연합뉴스

운동권의 우상인 민중이란 북한식 인민이고, 계급독재를 뜻한다. 그리고 민족이란 좌파 민족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위험성을 경계하고 이성화 하는 걸 자기소임으로 삼았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반대로 움직였다. 그 증거가 <태백산맥>의 조정래 위험성을 인지 못한 대목이다.

<태백산맥>은 물론 조정래의 모든 소설이라는 게 민중-민족 코드를 버무려 만든 2.5류 작품이라는 걸 이어령만 몰랐다. 그래서 초대 문화부 장관 시절 "<태백산맥>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쓰여진 <신판 홍길동전>이다"고 뻥을 쳤다. 검찰에 제출한 주무장관 의견서가 그 따위였다. 그 결과 이 작품의 이적성 여부를 수사하던 검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했다.

2005년 검찰이 <태백산맥> 무혐의 결정을 내린 것도 그런 배경이다. 지난 글 지적대로 그는 한국사회 갈등과 현안에 한 번도 책임 있는 역할을 해본 적 없이 외려 불을 질렀다는 뜻인데,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그게 이어령 생애 가장 진솔했던 순간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몇 해 전 소원시(所願詩)를 중앙일보 지면에 발표한 것이다.
 
"벼랑 끝에서 새해를 맞습니다.
덕담 대신 날개를 주소서.
어떻게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까.
험난한 기아의 고개에서도
부모의 손을 뿌리친 적 없고
아무리 위험한 전란의 들판이라도
등에 업은 자식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앉아 있을 때 걷고
그들이 걸으면 우리는 뛰었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눈앞인데 그냥 추락할 수는 없습니다."
 
수사(修辭)가 훌륭하다. "역시 이어령"인데, 이어지는 대목에 한국인의 현주소와 북핵 위기의 현주소 역시 잘 녹아있다. "벼랑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어쩌다가 ‘북한이 핵을 만들어도 놀라지 않고, 수출액이 5000억 달러를 넘어서도 웃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거짓 선지자들을 믿은 죄입니까?/남의 눈치 보다 길을 잘못 든 탓입니까?"

지난 20년 한국 사회 위기를 이토록 훌륭하게 시의 그릇에 담아낸 작품도 드물다. 안타까운 건 이후 그가 일관된 발언, 책임 있는 행동을 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소원시'도 냉절한 시대 인식에서 나온 게 아니라 말재간으로 만들어낸 일회성 멘트였다는 뜻일까?

아무래도 그 판단이 맞을 듯싶다. 며칠 전 그가 쏟아낸 시대착오적이고, 가치없는 토박이 막 문화론이야말로 그 증거물이 아닐까? 아무래도 그는 자기 시의 표현대로 '거짓 선지자'는 아닐까? 회색의 안전지대에서 기생하는 위선적 리버럴리스트 말이다.

실은 6.25 이후 지금껏 그가 걸어왔던 길이 이 회색의 길이었지만 요즘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요즘 독서시장의 화제인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경고대로 우리의 천박한 정신문화가 끝내 이 나라를 "망국의 길"로 이끌지 모르는(390쪽) 아찔한 국면인데, 이어령 그는 여전히 문화 만담(漫談)에 빠져 산다. 기회는 남아있다. 생애 만년 그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