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무당' 이어령은 왜 영험함도, 철학도 없나?
2019-09-16 10:51:46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한국인은 편협한 순수주의와 신바람 광기가 특징
이어령은 철학 부재 때문에 이런 측면 이해 못해
이어령은 철학 부재 때문에 이런 측면 이해 못해
▲ 조우석 언론인 |
오늘은 그걸 실증해 보일 차례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의 토박이 '막 문화' 예찬은 이어령 문화론 중 최악에 속한다. 막걸리·막사발·막춤 등이 다음 세기 문명의 원천이란 주장은 실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다. 이 글로벌한 시대에 고유문화로 돌아가자는 '국뽕 선언' 자체가 터무니없기 때문인데, 그 점은 디테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막사발의 경우 일부 일본인이 극찬하고 있지만, 분업 공정이 없이 대충 만든 그릇이란 성격엔 변함없다. 그걸 옛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구수한 큰 맛'이라고 평가했지만, 한국의 으뜸가는 멋이라고 떠받들 순 없다. 정교함이 떨어지는 우리의 미숙함 내지 거친 면 때문이다.
그게 문제다. 타계한 철학자 김형효가 지적했듯 한국인 집단무의식에도 확실히 그런 요소가 들어있다. 주자학에 몰두하는 우리 특유의 근본주의적 기질이 있고 그게 순수주의를 반영한다면, 동시에 촛불 시위 등이 보여주듯이 이성과 담 쌓은 광기의 신바람이 동시에 있다. 한국인은 이 편협한 순수와, 광기의 신바람 사이를 오가는 묘한 이중성이 특징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맑음-순수-지조-절개를 동경해온 반면 좌옹(佐翁) 윤치호 지적대로 우리에겐 90%의 감성과 10%의 이성으로 사는 광기의 신바람이 동시에 존재한다. 광기의 신바람이 이어령이 말하는 토박이 문화 즉 막 문화의 실체일텐데, 어찌 그걸 대놓고 숭배할 수 있단 말인가?
깊이가 없는 이어령이 채 모르고 있는 것은 고대의 원효-의상 그리고 조선조 퇴계-율곡의 철학이란 신바람 정서를 이성화하는 작업이었다는 점이다. '약이자 독'인 집단정서를 한 차원 높이려했던 게 그들 철학이다. 그건 지금도 우리 과제다. 광우병과 탄핵 촛불집회 때 국민 전체가 폭민(暴民)으로 돌변하는 문화사적 배경에도 그게 있지 않은가.
북한의 광기란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건 독재자 김정은의 작품이지만, 실은 2000만 주민들의 기질과 정치의식 즉 한국인의 풍토에서 만들어진 괴물 정치체제가 아닐까? 확실히 우린 너무 거칠고 세련화가 덜 됐으며 그 결과 때론 광기로 치닫곤 한다. 그건 분명히 우리의 한계다.
때문에 막걸리·막사발·막춤의 막 문화란 순치되고, 세련화되어야 할 대상이지, 다음 세기 문명의 원천일 순 없다. 확실히 이어령은 문명과 문화사 전체를 보는 시야가 없으며, 책임 있는 발언을 하는 사람은 못 된다. 그가 책임 있는 원로라면 지금 무얼 해야 할까? 지난 30년 한국 사회를 지배한 원리가 민중-민족이란 걸 확인하고 그것과 씨름할 것이다.
▲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막걸리·막사발·막춤의 막 문화란 순치되고, 세련화되어야 할 대상이지, 다음 세기 문명의 원천일 순 없다. 확실히 이어령은 문명과 문화사 전체를 보는 시야가 없으며, 책임 있는 발언을 하는 사람은 못 된다. /사진=연합뉴스 |
운동권의 우상인 민중이란 북한식 인민이고, 계급독재를 뜻한다. 그리고 민족이란 좌파 민족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위험성을 경계하고 이성화 하는 걸 자기소임으로 삼았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반대로 움직였다. 그 증거가 <태백산맥>의 조정래 위험성을 인지 못한 대목이다.
<태백산맥>은 물론 조정래의 모든 소설이라는 게 민중-민족 코드를 버무려 만든 2.5류 작품이라는 걸 이어령만 몰랐다. 그래서 초대 문화부 장관 시절 "<태백산맥>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쓰여진 <신판 홍길동전>이다"고 뻥을 쳤다. 검찰에 제출한 주무장관 의견서가 그 따위였다. 그 결과 이 작품의 이적성 여부를 수사하던 검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했다.
2005년 검찰이 <태백산맥> 무혐의 결정을 내린 것도 그런 배경이다. 지난 글 지적대로 그는 한국사회 갈등과 현안에 한 번도 책임 있는 역할을 해본 적 없이 외려 불을 질렀다는 뜻인데,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그게 이어령 생애 가장 진솔했던 순간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몇 해 전 소원시(所願詩)를 중앙일보 지면에 발표한 것이다.
"벼랑 끝에서 새해를 맞습니다.
덕담 대신 날개를 주소서.
어떻게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까.
험난한 기아의 고개에서도
부모의 손을 뿌리친 적 없고
아무리 위험한 전란의 들판이라도
등에 업은 자식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앉아 있을 때 걷고
그들이 걸으면 우리는 뛰었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눈앞인데 그냥 추락할 수는 없습니다."
덕담 대신 날개를 주소서.
어떻게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까.
험난한 기아의 고개에서도
부모의 손을 뿌리친 적 없고
아무리 위험한 전란의 들판이라도
등에 업은 자식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앉아 있을 때 걷고
그들이 걸으면 우리는 뛰었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눈앞인데 그냥 추락할 수는 없습니다."
수사(修辭)가 훌륭하다. "역시 이어령"인데, 이어지는 대목에 한국인의 현주소와 북핵 위기의 현주소 역시 잘 녹아있다. "벼랑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어쩌다가 ‘북한이 핵을 만들어도 놀라지 않고, 수출액이 5000억 달러를 넘어서도 웃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거짓 선지자들을 믿은 죄입니까?/남의 눈치 보다 길을 잘못 든 탓입니까?"
지난 20년 한국 사회 위기를 이토록 훌륭하게 시의 그릇에 담아낸 작품도 드물다. 안타까운 건 이후 그가 일관된 발언, 책임 있는 행동을 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소원시'도 냉절한 시대 인식에서 나온 게 아니라 말재간으로 만들어낸 일회성 멘트였다는 뜻일까?
아무래도 그 판단이 맞을 듯싶다. 며칠 전 그가 쏟아낸 시대착오적이고, 가치없는 토박이 막 문화론이야말로 그 증거물이 아닐까? 아무래도 그는 자기 시의 표현대로 '거짓 선지자'는 아닐까? 회색의 안전지대에서 기생하는 위선적 리버럴리스트 말이다.
실은 6.25 이후 지금껏 그가 걸어왔던 길이 이 회색의 길이었지만 요즘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요즘 독서시장의 화제인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경고대로 우리의 천박한 정신문화가 끝내 이 나라를 "망국의 길"로 이끌지 모르는(390쪽) 아찔한 국면인데, 이어령 그는 여전히 문화 만담(漫談)에 빠져 산다. 기회는 남아있다. 생애 만년 그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 /조우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