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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석 언론인 |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국악사랑 얘길 전한 첫 글에서 밝힌 대로 우리 문화유산 중 국악 장르야말로 가장 빼어나며 경쟁력이 있다. 일테면 서화나 문학 장르가 중국의 아류인데 비해 국악은 영판 다르다. 문제는 그 멋과 맛을 제대로 아는 건 열린 귀를 가진 몇몇이라는 점이다.
어느 날 국악에 빠져 자기 직업까지 팽개치고 국악동네 사람이 되어버린 사진가 김영일(57) 얘기는 그래서 특별하다. 본래 그는 인물사진 한 번 찍는데 1000만 원을 받았을 정도로 잘 나갔다. 그러던 그가 20년 전 젊은 소리꾼 사진을 찍어달라는 의뢰를 잡지사로부터 받았다. 렌즈 앞의 소리꾼에게 "평소 하던대로 자연스럽게 소리나 해보라" 주문했다.
그가 단가 '편시춘'을 시작했다. 단가는 판소리를 하기 전에 목을 푸는 짧은 곡인데, 그런데 이 뭐란 말인가? 첫머리 "아서라, 세상사 쓸데없다…"를 듣는 순간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불과 3~4초, 숨이 막혀 셔터를 누를 생각조차 못했을 정도였는데, 본래 그는 클래식광이었다.
모차르트-베토벤만 음악이라서 라디오에서 국악이 흘러나오면 바로 채널을 돌리곤 했는데 그날 번개를 제대로 맞은 것이다. 그길로 바로 국악녹음전문회사(악당이반)를 차렸는데, 그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철학자 니체 식으론 '본능의 탈선'이다. 그 순간 옛 사람의 낡은 감각이 죽고, 삶의 질서가 온통 뒤바뀌어버린 경우인데, 국악이 그렇게 힘이 위력적이다.
내 경우 10대 시절인 1970년대 초반 KBS-1FM에서 나오는 클래식과 국악에 젖어 산 이래로 지금껏 국악은 내 감수성의 일부다.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한 한명희(80) 전 서울시립대 교수가 펴낸 새 책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한악계(韓樂界)의 별들>, <학 떠난 빈터에는>(이지출판)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게 다가온 배경이 그렇다.
10년 전 진옥섭 <노름마치>가 국악을 포함한 전통예인 이야기를 유쾌하게 전했다면, 한 교수의 책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국악학을 전공했으니 상대적으로 격조가 있다는 차이가 있을까? 책에 등장하는 가야금 산조의 명인 김죽파, 판소리 명창 송만갑, 대금 명인 김성진 등이 모두가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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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소리 300년 여류 명창 중 언제나 첫손에 꼽히던 김소희 명창. 청아하며 미려한 애원성(哀怨聲)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한명희 교수와는 오랜 신뢰를 나누던 사이다. |
내게 특별히 관심을 끄는 건 김소희 명창이다. 그는 영화 '서편제'에서 구음(口音)으로 출연한 분이다. 구음은 재즈의 스캣과 닮은꼴이다. 악기소리를 흉내 내 별 뜻 없이 이뤄지는 입소리인데, 김소희 구음은 듣는 이를 바로 무장해제시킨다. 지금은 음반 '김소희 온고지신'의 첫 곡으로 들을 수 있고, 유튜브에서 '김소희 구음'으로 검색해도 감상할 수 있다.
그가 남긴 판소리 '심청가'와 '춘향가' 완창 녹음이 있지만, '구음'은 젊은 시절 목소리와도 또 다르다. 젊은 시절엔 여성적이면서도 호소력있는 소리 즉 애원성(哀怨聲)으로 분류됐으나 만년의 '구음'은 걸걸한 맛이 더해지면서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국악만의 매력을 발산한다.
그런 김소희 명창은 만년에 KBS가 일대기를 찍자고 제안하자 한 교수와의 대담이라면 출연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김소희 명창이 민속악이라면, 정악에서 독보적인 게 김월하 명창이다. 당시 유일한 여창가객인 그의 분위기를 한 교수는 이 책에서 "정가계의 군계일학"으로 묘사했는데, 격조 높은 그를 아는 나로서는 조금도 낯설지 않다.
사실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한악계의 별들>, <학 떠난 빈터에는>에 등장하는 분은 명인 명창 외에도 서울대 국악과를 만든 국악학의 태두 만당(晩堂) 이혜구, 정가의 맥을 잇게 해줬으나 1930년대에 작고했던 금하(琴下) 하규일 같은 분들과 관련된 일화도 없지 않아 공부가 된다.
특히 금하의 경우 조선조말 한성부윤 즉 지금의 서울시장을 지냈으나 정가 쪽 교육자로 전신한 분으로 유명하다.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서 정가를 가르쳤는가 하면 일제시대 다동권번을 조직해 가곡 가사 시조 등을 교육시킨 것도 그였다. 이병성 이주환 등도 그의 문하이지만, 여성 제자 중에 시인 백석의 애인이던 김진향도 포함됐다는 걸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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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하 이전에 월하 없었고, 월하 이후에 월하 없다"는 평가를 들어온 여창가객의 대명사 김월하. 김소희 명창이 민속악이라면, 정악에서 독보적인 게 그였다. |
고(故) 김진향 여사, 그는 요정 대원각의 주인으로 평생 모았던 재산을 1997년 시주해 현재의 성북동 길상사를 세운 주인공이다. 시주액은 당시 돈으로 1000억 원 상당이다. 그 전에 금하로부터 정가를 배웠는데, 일제하에서 생활고로 권번 기생이 된 것이 계기였다. 그런 김진향은 생전 한명희 교수에게 여러 차례 속내를 밝혔다는 게 흥미롭다.
"죽기 전 백석을 한국문화사에, 금하를 한국음악사에 또렷이 부각시켜 놓은 것이 마지막 소망입니다." (<학 떠난 빈터에는> 109쪽) 그의 뜻은 실제로 구현됐다. 월북 문인 백석은 지금 20세기 최고 시인으로 재평가되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함께 나온 책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한악계의 별들>에는 첫 공개되는 또 다른 일화 두 개가 눈길을 끈다.
하나는 1990년대 말 김진향 여사는 저녁식사 제안을 한 교수에게 했다. 위아래 순백의 양장을 차려입고 나온 그는 죽기 전 가곡 한 바탕을 국악원에서 레코딩하자는 깜짝 제안을 했다. 실제로 녹음 작업에 들어갔는데, 악화되는 건강 때문에 끝내 미완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전인 1990년대 초반 김 여사는 한 교수를 찾아와 원고뭉치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백석과의 사랑 이야기인데, 읽어보고 좀 다듬어달라고 청했다. 당시 한 교수는 백석을 잘 몰랐고, 또 원고도 좀 진부하다는 판단이 들어 "젊은 학생을 소개시켜드리겠다"고 조언했다. 얘기는 그걸로 끝났다. 몇 해 뒤 그 원고가 토대가 된 책 <내 사랑 백석>이 우송돼왔는데, 그게 1995년이다.
지금 나는 알고 싶다. 금하에게 배웠다는 김진향의 가곡이 어떤 내공이었는지, 김월하의 격조와는 어떻게 또 다른 색깔이었을까. 김진향이 평생을 백석과 금하를 생각했던 특별한 사람이기에 관심을 멈출 수 없다. 얘기가 문학까지 넓어진 마당에 백석이 1936년에 쓴 명시 중의 명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음미해보는 걸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눈 내리는 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산골에 몰래 숨어들고자 하는 낭만적 상상이 이토록 멋진데, 근현대시사에 이만큼 몽환적 성격의 사랑시는 일찍이 없었다. 20세기 최고의 서정시의 탄생 배경이 바로 그러했고, 그게 국악인과 얽혀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다.
참고로 김진향은 생전 "어찌 그렇게 큰돈을 절에 기부할 수 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을 했다. "이 돈은 백석,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해요." 20세기 국악 역사에 이런 멋진 스토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증언해준 한명희 교수 두 책의 가치를 새삼 기억해둘 일이다. /조우석 언론인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조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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