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과 광기로 넘쳐나는 '무정부 광장'…정치가 광장에 예속되는 일 막아야
   
▲ 윤주진 객원 논설위원
최근 대한민국이 이른바 '광장 민주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극심한 교통 불편과 비용 소모, 그리고 광장에 대한 숱한 거부감을 고려한다면 몸살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어디에서 몇 백만이 모였다는 말이 쉽게 나오는 요즘, 이대로라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능가하는 누적 집회 참여 인원이 계산될 기세다.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는 과장이라는 이야기다.

슬슬 광장 민주주의로 인한 피로감, 그리고 그 위험성에 대한 경고음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저 다행이라고 덮고 넘어가기엔 찜찜하다. 광장 민주주의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늦어도 한참 늦었을 뿐 아니라, 주로 광장을 옹호했던 이들의 반성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적어도 200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 정치사만 보더라도, 주로 광장은 진보좌파세력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보수우파의 광장 정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안보단체나 종교인들의 대규모 집회, 또는 기도회도 열렸었다. 하지만 집회의 규모, 방식, 프로그램 등 모든 면에서 진보좌파의 그것들에 비할 바는 못됐다.

한편 진보좌파는 늘 자신감 있는 태도였다. 모였다하면 '주최 측 추산' 몇 십만, 몇 백만을 우기며 세 과시를 했다. 비싼 입장료를 주고 가야 볼 수 있는 유명 가수와 연예인들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락 페스티벌 못지않은 열광적 분위기마저 연출해 주는 진보좌파의 집회는 오죽하면 '재밌어서'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할까. 진보좌파는 늘 광장을 과대평가해 왔고, 신성시해 왔다. 제도권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정한 민심을 확인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의 현장으로 추켜세워졌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주로 광장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쪽은 보수우파였고, 광장 민주주의를 두둔하는 쪽은 진보좌파였다. 그리고 대규모 도심 집회 등에 대해 보수우파가 비판의 목소리를 내놓을 때마다 진보좌파는 '민심을 외면한다', '광장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식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광장을 기존 정치의 대안으로까지 여기기도 했던 진보좌파이고, 그들을 지지 기반으로 삼아 출범한 이 정권은 스스로 자신을 '촛불혁명 정권'으로 명명하지 않았는가?

   
▲ 자유한국당과 범보수·우파 시민들이 지난 3일 오후 1시부터 서울 세종대로를 가득 메워 조국 법무부 장관 사퇴 등을 요구하는 장외집회를 열고 있다./사진=독자 제공

   
▲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검찰 개혁 촛불 문화제에서 참석자들이 '조국 수호' 구호를 외치고 있다./연합뉴스

그런데 이 구도가 최근 들어 깨졌다. 진보좌파의 광장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이 흔들려 버린 것이다. 앞서 서초동 검찰 앞 촛불집회를 200만으로 자평했던 이들은 곧 이어 개최된 광화문 反조국 집회의 어마어마한 규모 앞에서 더 이상 '숫자'를 말하지 못하게 됐다. 이어 지난 5일 더 큰 조국 지지 집회가 열렸으나 이제 더 이상 수적 비교는 무의미해져버렸다. 이는 광장에서의 세 과시가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나아가 광장 민주주의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그런 현 시점에서 특정 정파나 인사가 광장 민주주의 경계론을 제기하는 것은, 진정으로 광장의 위험성을 살피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왜 하필, 한 쪽 진영이 독차지했던 광장이 양 진영에 의해 분점 되고 나서야 광장 회의론이 나와야만 하는 것인가. 그것은 광장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반성일까, 아니면 움켜쥐다 놓쳐버린 무기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오염' 전략인가. 광장 민주주의 비판의 정치적 의도가 엿보일 수밖에 없다.

애초부터 광장은 제도권을 능가하는 상위의 정치가 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주권자인 국민의 목소리에 정치가 응답해야 하는 것은 지당하나, 그것에 있어 광장과의 소통이 최우선이 되는 순간 광기와 폭력의 광장에 정치가 예속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광장은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는 교정(corrective)의 역할을 할 순 있어도, 그 대안(alternative)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20세기 인류가 겪은 격동의 정치사를 통해 확인한 바다. 이 자명한 진실에 지금껏 침묵하고 광장에 편승해오다, 왜 지금에서야 태도를 바꾸는가.

보수우파의 역주행도 우려된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강력한 투쟁의 동력을 광장에서만 찾으려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광장은 여러 수단과 방법 중 하나일 뿐이고, 또 일시적이면서도 매우 제한적인 이벤트다.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대규모 집회 성공에 취해 광장을 민심으로 등치시키는 오류를 범한다면, 위험한 광장 민주주의에 다시 부채질을 하는 과오를 남길 수 있다.

불순한 정치적 의도에 의한 광장 민주주의 비판, 또는 뒤늦은 광장 편승 정치는 모두 우리 민주주의 정치 발전을 저해한다. 광장 민주주의의 위험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른바 '올바른 광장 활용법'을 정치권이 공유해야 한다. 제도권의 원만한 타협과 양보, 조정이 결국 성숙한 정치를 가능케 하는 근본적 길임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 중요한 역할의 키는, 가장 높은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선출직 공직자, 대통령에게 있다. 정치를 광장 밑으로 종속시키지 않으려면, 대통령이 직접 '정치'에 나서야 한다. 정치가 아닌 투쟁에 몰두하는 대통령이라면 광장 민주주의의 위험은 더 더욱 한국 사회를 지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윤주진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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