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진 자유에 대한 소중함을 잃어가는 시대가 낳은 일그러진 자화상
   
▲ 성제준 객원 논설위원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할 수 있는 권리는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식인 볼테르의 이 격언은 어느덧 틀에박힌 클리셰(cliché)가 되어버렸다. 볼테르에게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우리에게는 거대한 축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위대한 지식인의 표효가 구태 연연해질수록 그만큼 자유가 자연스러워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볼테르의 격언이 클리셰가 되는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볼테르의 관용주의가 그리 찬란한게 빛을 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또 아이러니하게도 지독히 자유가 박탈됐던 시대 덕분이기 때문이다. 참혹한 시대에 견주어, 볼테르는 표현의 자유를 외쳤고, 그는 결코 올 것 같지 않은, 자신의 외침이 언젠가는 클리셰가 될 날을 꿈꿨다.  

우리는 운 좋게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났다. 아니, 자유를 누리는 수준이 아니라 자유란 당연한 것으로 마치 없어도 그만인 듯한 시대를 살고있다. 참으로 자유에 익숙해져버렸다. 하지만 갓난아기가 어미의 젖을 떼면 어미를 향한 착취를 시작하듯, 우리도 익숙함에 이끌려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다. 익숙함에 박탈당한 자에게 애달픔이란 없다. 그저 '그럴 줄 몰랐다'는 후회와 절망만 있을 뿐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끊임없는 욕망은 결코 완결될 수 없다. 그들 조차도 인간의 익숙함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욕망하고 성취하되 어느새 익숙해지고 버려버리고 마는, 인간의 원죄에서 그들도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우리도 이 원죄 앞에 서있다. 자유를 갈망했고 성취했지만, 어느새 익숙해져 버려 그 소중함을 망각해버리고 있다. 

   
▲ 더불어민주당이 임미리 교수와 경향신문에 대한 고발을 취하했다. 하지만 당 대표 등 지도부의 공개 사과는 없었다. 국민의 수준을 우습게 아는 독선과 오만이다. 사진은 이해찬 대표 주재의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가 10일 국회에서 열리고 있다./사진=더불어민주당

지식인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경고한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보이지 않을 듯한 작은 구멍을 들춰내어 우리에게 앞으로 닥칠 공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고요함 가운데에서 폭풍을 찾고 폭풍이 닥쳤을 때 고요함을 찾을 수 있게 우리를 인도해준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평범함을 거부하는 광인들(schizo)이다. 

불행하게도 광인의 경고에 귀기울이는 건 쉽지않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광인을 거부한다. 우리는 안정을 추구하고 '안전지대(comfort zone)'에서 벗어나길 거부한다. 보이지도 않는 균열을 보인다고 소리치며 대비해야 한다고 외치는 지식인은 손쉽게 미치광이로 보일 수 있다. 정치인들과 수많은 어용 지식인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저들은 미치광이일 뿐이라 속삭이고 그렇게 의심은 금새 확신이 된다. 

우리는 질문해봐야 한다. 대한민국은 과연 광인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가? 혹여나 우리는 익숙함에 속아 광인을 미치광이라 돌팔매질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자유가 파괴되고 있는 것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던 한 교수는 고발당했다. 아, 광인이 미치광이라 쫓겨나고 진짜 미치광이가 자유를 희롱하는 이 모습이 당신의 눈에는 보이는가?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날까 두려워 발을 뺀 자들을 위해 저들은 '우리가 고발해줄께'라고 말한다. 이들은 광인을 내쫓고 미치광이들이 자유를 희롱하게 만드려고 한다. 우리는 이들이 결코 활보하게 놔둬선 안 된다. 이제 우리가 광인이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가 '나도 고발하라'고 외쳐야 할 때이다. /성제준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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