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북미 하노이회담 1년, 북한은 급할 게 없어졌다
김소정 부장
2020-02-25 17:47

   
김소정 기자
[미디어펜=김소정 기자]북한 말에 ‘천천히 만만둥이가 돼라’는 표현이 있다고 한다. 또 ‘뜬 놈도 살고, 빠른 놈도 산다’는 말도 있다. ‘만만둥이’는 ‘느림보’와 같은 표현이고, ‘뜬’은 우리말의 ‘굼뜨다’와 같은 말이다. 두가지 표현 모두 ‘덤비거나 보채지 말라’는 의미로 처세술을 나타내는 속담이다. 


돌려서 말하면 ‘어떤 일에 급하게 나서지 말고 주변 눈치를 봐가면서 천천히 하라’는 뜻으로 북한주민들이 일터나 가정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북한 당국이 이끄는 거의 모든 사업에서 빠지지 않는 구호인 ‘속도전’과 완연히 대비된다.


최근 북미 간 교착 국면이 길어지는 상황에서 미국의 대화 제의에도 꿈쩍 않는 북한의 태도가 바로 ‘만만둥이’ 전략으로 보인다. 미국이 원하는 것을 다 알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도 다 보여준 북한은 이제 급할 게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 선물’을 예고하며 으름장을 놓던 것과 달리 여유를 부리고 있다. 북한의 도발 예상 시점은 연말을 넘기더니 1월8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생일, 2월1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도 지나갔다.


사실 1월 중순부터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로 북한은 그동안 방역에 총력을 기울이느라 다른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수 있다. 혈맹국이라지만 즉각 중국과 국경을 차단했고, 남한의 사태를 주시하면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22일 남한 감염사태를 총 9건이나 싣는 등 집중 보도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북한이 잠잠하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 지난해 10월 북미 스톡홀름회담의 뒷얘기 때문이다. '스톡홀름 노딜'은 북한이 예고한 ‘새로운 길’의 시작이고, 앞으로 북미협상이 재개된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스톡홀름회담 결과를 보면서 당초 북한이 ‘노딜’이라는 입장을 갖고 나왔다는 분석이 많았다. 별로 실권도 없어 보이는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가 스티브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회담한 뒤 마치 준비된 듯한 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회담에서 미국은 그동안 북한이 요구해오던 조건들을 제법 들어줬다고 한다. 북한 비핵화와 미국 상응조치의 동시 이행과 대북제재의 부분적 해제도 제시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명길 대사가 반드시 손에 쥐고 북한으로 돌아가야 하는 조건이 한미합동 군사훈련 중단이었고, 미국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스톡홀름에서 벌어졌던 북미회담의 내막을 잘 아는 어느 북한전문가의 전언이지만, 만약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면 북한의 ‘새로운 길’은 앞으로 중국과 협력하면서 미국의 동북아전략을 막아내는 길일 수 있다. 향후 북미 비핵화 협상이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북한의 한미군사훈련 중단 요구는 어쩌면 지난해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것에 큰 실망감을 안았던 김정은 위원장이 ‘체면 세우기’ 용으로 미국의 한미훈련 중단 선언을 이끌어내서 협상에 다시 임하는 명분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왼쪽부터)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연합뉴스

하지만 만약 북한이 자신들의 새로운 길에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미국의 태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아주 들어주기 어려운 조건을 내세운 것이라면 북한이 앞으로 내세울 ‘상호 군축’ 요구의 첫 목표는 한미훈련 중단과 한반도에서 미국의 전략무기 철수 등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바로 북한이 자신들의 관영매체를 통해 주장해왔던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서 북한은 ‘하노이 노딜’ 이후 ‘새로운 길’을 말하며 대북제재 대신 체제보장을 주장해왔다. 그리고 체제보장은 김 위원장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한 뒤 푸틴 대통령의 입을 통해서도 주장됐고, 이어 푸틴 대통령과 만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언급했다.  


그동안 시 주석은 ‘쌍중단‧쌍궤병행’이라는 말로 한미훈련 중단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북한의 핵포기가 없는 상황에서 중국 최고의 동북아 전략이자 우선 목표인 쌍중단을 한미가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도 김정은 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진 뒤 언론에 북한이 한미훈련중단 요구를 하지 않았다고 확인해준 바 있다.


군축 문제는 남북 간 한반도 평화 유지를 위해 합의된 9.19 군사합의처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와 비무장지대(DMZ)내 감시초소(GP) 각 10개 시범 파괴, 지·해상·공중 적대행위 중지 등을 발전시키는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남북 군사공동위원회 논의는 중단됐고, 북한은 실제 도발했거나 도발을 예고하는 등 언제든 폐기 가능한 것도 현실이다.  


사실 한미군사훈련 중단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단독으로 연 기자회견에서 “한국과 논의해야 할 것”이라면서 직접 언급한 바 있다. 이후 한미군사훈련은 축소돼 운영된 적은 있지만 중단된 적은 없었다.


현재 방위비분담금 인상을 놓고 양보 없는 미국이 향후 한미훈련이나 주한미군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 미국과 중국의 경쟁구도가 유지될 수밖에 없고, 양국간 갈등도 고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한미훈련 중단이나 주한미군 철수는 당장 상상하기 힘든 일인 것도 사실하다.


또 다른 스톡홀름 뒷얘기로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연간 200만명에 달하는 관광객을 지원받고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을 접었다는 말도 들린다. 이와 함께 북한은 언제나 그랬듯이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미 핵보유국 반열에 오른 만큼 어떤 계기를 맞이하든 협상력을 올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한다. 


돌이켜볼 때 북미대화에 나서면서 비로소 중국과 관계 복원에 성공한 김정은정권은 중국정부가 자신들의 뒤를 든든하게 봐준다는 보장이 없어지지 않는 한 어려운 협상의 길에 서두를 이유가 없어졌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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