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선보인 가사 비평집…시대의 반영이자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밀알
[미디어펜=문상진 기자]"가사는 지면이 아니라 허공에서 명멸한다. 써서 읽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르는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운명이다. 읽지 말고, 듣고 불러 봐야 안다. 그게 얼마나 좋은 가사인지를." -5면

"음악은 이곳의 언어이자 피안(彼岸)의 언어다. 그래서 그 오랜 옛날부터 음악은 샤먼의 언어였다." -15면

   
흔히 좋은 노래는 뛰어난 멜로디와 가창력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진짜 명곡을 완성하는 것은 '한 줄 노랫말'이다. 좋은 가사의 힘은 이념과 체제를 넘어서거나 맞설 정도로 강력하다. 운율을 담은 가사는 시가 되기도 하고, 짧은 소설이 되기도 한다. 그 자체로 문학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거의 처음 시도되는 가사 비평집이 나왔다. 이주엽 작사가(JNH뮤직 대표)가 쓴 가사 비평집 '이 한 줄의 가사'(열린책들)다. 저자는 좋은 가사는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면서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변곡점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노랫말에 담긴 문학성, 독창성, 시대성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주제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즐겨 듣던 가요의 노랫말 속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 우리 대중음악의 선구자들이 어떤 언어와 감성을 통해 새 시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는지 흥미롭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배호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 한영애 '누구 없소', 들국화의 '행진',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싸이의 '챔피언', 아이유의 '가을 아침' 등 세대를 아우르는 히트곡 41곡에 담긴 가사를 골라 시대적 배경과 감성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송창식이 노래하고 최인호가 작사한 '고래 사냥'은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라는 후렴구 덕분에 70년대 군부 독재하에서 숨죽이던 청춘들은 그나마 '정신의 숨통'을 틀 수 있었다고 진단한다. 들국화의 '행진'에 나오는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는 불운과 시련마저 축복으로 삼겠다는 청춘의 결기를 읽는다. 

송골매의 '모여라'의 "회사 가기 싫은 사람 / 장사하기 싫은 사람 모여라"는 1990년대 개발도상국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근면의 세계'에 던지는 유쾌한 돌팔매질이었다. 혁오가 노래한 '톰보이'의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 가는데"에서는 행복과 자아실현을 기약할 수 없는 요즘 청춘들의 신산한 삶을 들여다본다. 

이 책은 가사 비평서인 동시에 저자가 대중음악의 선구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북한강에서'를 부른 정태춘은 "한(恨)과 그리움의 토착적 정서를 독보적으로 그려 온" 싱어송라이터로 정의하고 "가사의 문학성으로 따지면 한국 대중음악사 가장 앞줄"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부르는 노래' 조동진에 대해서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위대한 운문의 시대가 있었음을 증언한 뮤지션"으로 평한다. '시인과 촌장' 하덕규는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서성이던" 음악가로, 배호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하나의 장르다. 한 시대 가창의 표준을 만들었다"고 찬사를 보낸다.

저자 이주엽은 작사가이자 'JNH뮤직' 대표이다. 한국일보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현재까지 음악 레이블 JNH뮤직을 운영하고 있다. 70년대 최고의 디바 정미조,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 집시 기타리스트 박주원, 라틴 밴드 로스 아미고스 등의 음반 제작과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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