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민심의 선택을 자의적으로 해석 말고 뼈 아프게 봐야는데...
수 싸움 이길 생각 말고 수 만든 쪽으로 고개 돌리는 게 급선무
|
|
|
▲ 이석원 정치사회부장 |
[미디어펜=이석원 정치사회부장]누군가의 눈에는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건물이 폭파돼 무너져 내리는 것보다 더 비참하고 참혹해 보였던 건 두 달여 전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2020년 4월 15일이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미증유의 고통이었을 테니 말이다.
정신 차리고 반성도 하고, 앞으로의 일을 위한 대책 마련도 하고, 상처안은 가슴은 보듬고 서로 힘을 합쳐 고난을 헤쳐 나가자는 결의를 다지는 것도 어지간히 망가졌을 때나 가능하지, 사실상 존재 자체가 부정될 만큼 처참히 망가졌을 때는 한동안 늪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임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게 정치라면, 대한민국의 운명을 재단할 수 있는 역할의 한 쪽이라면 사람들은 얼마나 그들에게 그런 정신 차릴 시간을 줄 수 있을까? 어느 정도 시간이면 충분히 이해하고, 그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며 와신상담하라고 보아줄 수 있을까? 불운한 건, 보통의 시민들은 그다지 오랫동안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2020년 4얼 15일은 미래통합당이라는 정당에게 뿐 아니라 대한민국 보수 진영 국민들에게 충격적이고, 경악스럽고 비참한 날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참혹하게 선거에서 패배했고, 그 한순간에 정권 창출을 위한 거의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다. 민심의 엄혹한 판결을 받은 것이고, 시민들에게 처참하게 버려졌다고 해도 누구 하나 심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다.
그리고 정확히 두 달이 지난 6월 15일, 미래통합당의 가엾은(?) 인사들은 더불어민주당이라는 거대한 적에게 야당의 당연한 차지라고 생각했던 법제사법위원장을 ‘찬탈’ 당했고, 국회의장이 가라는 데로 상임위에 강제 배치 당하는 사실상 ‘임명직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전락해버렸다.
통합당의 한 의원은 “이 또한 우리가 자처한 일이 아닌가”하며 한탄을 했고, 또 다른 초선 의원은 “내가 이러려고 국회의원이 됐나 하는 자괴감...”이라며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 특히 ‘청운의 꿈’을 안고 초선의 길에 들어선 의원들의 상실감이 매우 컸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문제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제대로 끽소리 한 번 못 냈다는 것이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이 박병석 국회의장이 자신들의 상임위 배정을 강제하고, 민주당 윤호중 의원에게 법사위원장의 위를 넘기는 의사봉을 치고 있을 때 본회의장 앞에서 구호 몇 번 외치고, 남 안 들리게 육두문자 몇 마디 옹알거린 게 다라는 것이다. 한 초선 의원은 “그나마도 맥없는 목소리로 뭔 소린지도 모르는 구호 몇 번 외치더니 말더”란다.
그래도 이들은 시민들을 믿었다. 시민들이 “민주당 이것들에게 절대적인 의석을 줬더니 민주주의를 망각하고 지들 맘대로 하네”라고 혼쭐 내주기를 바랐고, “통합당 니들 이러고도 가만히 있으면 사람이 아니지. 여론은 니들 편이니 제대로 싸워봐”하고 격려해주길 바랐다. 그런데 아니란다. 민심은 여전히 이 가엾은(?) 103명의 인사들에게 “뭐 하니?” 하는 것이다.
제1 야당인 통합당이 거대여당 민주당에게 33년간 한 번도 뺏긴 적 없는 야당 몫의 법사위원장을 ‘강탈’ 당한 그 다음 날인 16일 오마이뉴스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500명(무선 80%, 유선 20% 자동응답 혼용방식, 응답률 5.2%.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4.4%p)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시민들은 18개 국회 상임위원장 중 6개 상임위원장을 통합당 불참 속에 선출한 것에 대해 절반 이상인 52.4%가 ‘국회법 준수, 국회 역할 수행 등을 위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합의 관행무시, 여당 견제 수단 박탈 등 잘못한 일’이라고 본 시민들은 37.5%에 불과했다.
더욱이 진보와 보수, 민주당 지지와 통합당 지지층이 아닌 이른바 중도 무당층에서 ‘잘했다’가 54.9%, ‘잘못했다’가 38.2%를 기록, 전체 결과와 거의 비슷한 결과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 ‘중도·무당층’은 지난 총선에서 통합당에게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비참한 결과를 안겨 준 바로 그들일 수도 있튼 것이다.
20대 국회를 시민들은 ‘사상 최악의 국회’라고 평가했었다. 언론들은 이를 뒷받침해주기 위해 20대 국회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폐기된 발의 법안이 1만 5000개가 넘는다고 앞다퉈 보도했다. 발의 건수로는 역대 다른 국회에 뒤지지 않는데, 패스트트랙 싸움, 법사위 계류 등으로 인해 처리율이 떨어져서 ‘최악의 국회’가 됐다고 친절한 설명도 했다.
20대 국회가 최악의 국회의 오명을 쓴 것은 통합당 때문이 아니다. 민주당과 통합당의 합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당은 민심으로부터 그 처벌을 냉정하게 받았고, 민주당은 겉으로는 상을 받은 모양새가 지난 총선이다. 왜 그랬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표를 던진 유권자들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앞선 여론조사에서도 보여졌듯이 21대 국회가 시작하자마자 국회 안에서 연출된 장면들에 대해 민심은 “여당은 일하는 국회를 위해 국회법을 준수하면서 유권자가 부여한 권한을 행사했다”고 봤고, 통합당에 대해서는 “합의와 여당 견제라는 명분으로 또다시 국회를 멈춰 세우려 한다”고 본 것으로도 해석이 된다.
통합당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이다. ‘왜 ‘독주’와 ‘독재’를 자행하는 거대 여당에 대해 시민들은 분노하지 않는 건가? 88년 개헌 이후 단 한 번도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여당이 독식한 일이 없었는데, 그 관행을 깬 여당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 건가?’ 답답할 것이다.
|
|
|
▲ 지난 15일 법사위원장을 비롯한 6개 상임위원장 선출 때 퇴장한 통합당 의원들이 본회의장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결국 통합당은 초유의 상황을 겪게 됐다./사진=연합뉴스 |
정치인은 늘 여론의 부정적인 면을 더 세심히 봐야 한다. 나와 동일한 생각을 가진 9명보다 다른 생각을 가진 1명에게 주목해야 한다. 심지어 나에게 동의하는 사람이 1명뿐이고, 반대하는 사람이 9명일 때는 그 이유를 따지기 전에 그 9명을 봐야 한다. 그런데 통합당은 아직도 자기에게 동조하는 1명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다른 9명이 왜 그러는지 답답해 하는 모양새다.
문제는 대통령 선거가 이제 1년 9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수적으로 우위인 상황이라도 정권 교체는 쉽지 않은 일인데, 이 절대 열세 속에서 과연 통합당은 대선의 문 앞에나 갈 수 있을까? 다른 군소 정당만큼의 존재감이나 가질 수 있을까? 심각하게 걱정해야 한다.
통합당 일부에서는 “차라리 나머지 12개 상임위원장도 다 가져가라고 하고, 상임위원 다 사임하고, 국회 망가진 책임은 독주를 일삼은 여당에게 있다는 것을 선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나 보다. 파행과 파탄의 정치적 책임이 여당에게 쏠릴 것을 기대하나 본데, 생각처럼 될지는 미지수다. 혹 ‘의원직 총사퇴’라도 걸면 모를까 지금 민주당에게, 또 통합당을 뺀 나머지 야당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씌우는 일은 단언할 수 없다.
대한민국 대부분 시민들은 어린 시절 민주주의에 대해 배울 때 ‘협치’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다른 표현은 들어보기는 했지만 그에 앞서 그들이 들은 것은 ‘다수결의 원칙’이다. 영국의 의회에서도, 미국의 하원에서도 협치보다는 다수결이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원리로 작용한다. 그렇게 배워온 대한민국 시민들은 ‘합의 정신’이나 ‘대화’니 ‘협치’를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면서도 특별한 상황에서는 결국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통합당은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초유의 상황에 처했다. 일상의 상황이 아닌 말 그대로 특별한 상황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민심의 선택들을 보고 있다. 그러니 마음을 고쳐먹어야 한다. 거대 여당이 자기들 뜻에 따라 정국을 운영해 가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혼자 하게 둬서도 안된다. 수에 밀리고, 힘에 밀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넋놓고 구경만 해서는 안된다. 결국 민심은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보다는 방관하고 손 놓고 있는 사람을 비난할 것이다. 그러면 2022년 대선도 없고, 지방선거도 없고, 2024년 총선도 없다.
잡지 못하고 있는 권력을 보지 말고, 권력을 줄 민심을 봐야 한다. 아마 춥고 배고프면 춥고 배고픈 민심이 이제야 제대로 보일 것이다.
[미디어펜=이석원 정치사회부장]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