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건희 회장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하고 있다./사진=삼성전자 제공 |
[미디어펜=김상준 기자]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이 회장은 살아생전 위기에 빠진 삼성전자를 ‘혁신의 리더십’으로 여러 차례 구해낸 바 있다.
이 회장의 대표적인 위기 극복 일화를 살펴봤다.
◇1993년 세탁기 불량 조립 사건
1992년은 삼성이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한 해였다. 삼성 반도체가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하며 세계 1위로 올라서는 기념비적인 1992년이었다.
세계무대 1위라는 기쁨에 젖어있던 삼성.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고, 밤잠을 설치며 다가올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고 한다.
“작년 중순부터 고민하기 시작해서 작년 말부터 하루에 3시간에서 5시간밖에 잠이 안 왔습니다” 이 회장은 1993년 오사카 회의에서 이처럼 말하기도 했다.
|
|
|
▲ 이건희 회장이 2005년 구미사업장을 찾아 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다./사진=삼성전자 제공 |
이건희 회장이 감지했던 위기는 그해 곧바로 들이닥쳤다. 품질보다 생산량 늘리기에 급급했던 생산 라인에서 불량이 난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사내방송으로 보도됐고 파장이 커지면서 질보다 양을 앞세우던 기존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세계 속에서 삼성의 위치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미국의 대형 전자제품 양판점인 ‘Best Buy’를 돌아보다가 진열대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채 있는 방치된 듯한 삼성 제품을 보게 됐다.
이 회장은 “삼성이라는 이름을 반환하라”며,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 어떻게 삼성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겠는가”라고 질책했다.
품질 문제가 대두되던 그때 이건희 회장에게 불량 세탁기 고발 영상이 담긴 사내방송 테이프가 전달됐다.
|
|
|
▲ 이건희 회장이 2012년 베트남 사업장을 찾아 액자에 서명을 하고 있다./사진=삼성전자 제공 |
이를 본 이건희 회장은 그동안 쌓여온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어록으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을 내놓았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신경영 대장정은 총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8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350여 시간의 토의로 이어졌다.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은 위기를 극복하고 ‘품질의 삼성’으로 거듭나게 됐다.
◇IMF를 극복한 이건희의 위기경영
대한민국이 OECD 회원국에 가입한 1996년, 삼성은 연평균 17%의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성장 일로에 들어선 삼성이 안심하고 기뻐하고 있을 때, 멕시코 티후아나 전자복합단지를 방문 중이던 이건희 회장은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장은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난다 싶으니까, 자기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건희 회장의 질책과 함께 삼성은 내부자만을 경계하고 장래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
|
|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10년 16라인 반도체 기공식에 참석한 모습./사진=삼성전자 |
삼성그룹은 경영 전 분야에 걸쳐 3년 동안 원가 및 경비의 30%를 절감하겠다는 ‘경비 330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차세대 사업에 집중하는 한편, 경영 합리화와 사업재 구축을 목표로 비상경영을 진행했다.
삼성이 비상경영에 돌입한 지 1년 후인 1997년, 대한민국에는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위기에 미리 대비하고 허리띠를 졸라맨 삼성은 외환위기라는 거센 파도 속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급변하는 세계 디지털 시장을 선점하는 기회를 만들어냈다.
IMF를 슬기롭게 극복한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은 오늘날에 이르러 삼성전자와 삼성그룹이 세계 일류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된 초석을 다지게 된 원동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미디어펜=김상준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