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가 사택의 침대방에서 ‘자고 가라’며 부하 여직원의 손목을 잡아당긴 행위가 성추행이 아니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면서 성희롱과 성추행의 구분 기준이 애매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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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원조차 성희롱과 성추행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못내리면서 일반 국민들은 더욱 혼란에 빠지고 있다./사진=뉴시스 |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성폭력범죄처벌법의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기소된 A(61)씨에게 벌금형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춘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일 밝혔다.
세탁공장 소장이던 A씨는 2011년 6월 부탁받은 밥상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사택을 찾은 B(56·여)씨에게 맥주를 권하고 침대방으로 들어오라고 유인했다. B씨가 거절했는데도 A씨는 “그래야 친해진다”며 담배까지 권했고, 불편함을 느낀 B씨가 가겠다고 하자 A씨는 “자고 가요”라고 말하며 B씨의 오른쪽 손목을 세게 움켜쥐고 자기 앞으로 당겼다.
검찰은 A씨를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기소했다. 1·2심 법원도 A씨의 행위를 성추행으로 인정해 유죄(벌금 300만원)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자고 가라’는 말을 성관계를 갖자는 의미로 파악했다. 그러면서 손목을 잡았기 때문에 업무상 부하직원인 피해자를 위력을 사용해 추행했다고 보기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손목이란 신체 부위를 단순히 접촉한 것만으론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이 생긴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성희롱으로 볼 수는 있지만 B씨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추행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성희롱은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낀 것만으로도 인정되지만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만 할 수 있을 뿐 가해자를 형사처벌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성희롱과 성추행의 정확한 구분은 어떻게 할까? 일단 대법원에서는 언어적인 것이나 성추행보다 피해가 약한 정도를 성희롱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판결을 놓고 비판 여론이 일고 있지만 피해 부위 역시 중요한 기준이 된다.
지난해 울산지법에서는 한 음악대학 정모 객원교수가 바이올린 레슨을 받으러 온 제자 4명의 주요 신체부위를 만지는 등 4개월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혐의로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정 교수는 “신체접촉 행위는 제자들의 자세를 교정하고 박자를 맞추기 위해 엉덩이를 두드리거나 배를 만진 것으로, 이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레슨 방법의 하나다.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던 중 나온 행위”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피해 부위가 성적으로 민감한 복부나 엉덩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반면 지난해 12월에는 청주지법에서 스트레칭을 해주겠다며 강제로 여성 식당종업원의 발목을 잡고 뒤로 젖히는 행위는 성추행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발목을 잡고 들어올렸을 뿐 다리를 벌리거나 종아리 부위를 쓰다듬고 만진 적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 추행의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대법원도 명확한 성희롱과 성추행 구분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관계자는 “성적 수치심에 대한 일률적 기준을 세우기는 어렵기 때문에 법원은 당시 상황, 피해자와 가해자의 특성, 행위의 정도 등을 종합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디어펜=이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