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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원 정치사회부장 |
[미디어펜=이석원 정치사회부장]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閉口深藏舌(폐구심장설)
安身處處牢(안신처처뢰)
유구한 중국의 역사 중 꽤나 주목받는 재상이 하나 있다. 풍도(馮道 882~957))라는 자다. 나기는 당나라 말기였는데, 그는 당나라 멸망 이후 이른바 오대십국시대 무려 5개의 왕조에서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927년 후당의 명종 이사원에 의해 처음 재상의 자리에 올랐던 풍도는 이후 후당이 멸망한 후 936년 후진이 건국했을 때 후진 고조 석경당에 의해 재상의 자리를 유지했고, 946년 요나라에 의해 후진이 멸하자 요의 태종이 또한 그를 재상에 기용했다. 풍도의 재상 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947년 한족인 유지원이 후한을 건국한 후 요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낼 때 풍도는 한족의 반란을 이끌어 다시 후한의 재상이 됐으며, 다시 950년 곽위가 구테타를 일으켜 후주를 세운 후 태조가 되고 풍도를 다시 재상에 기용했다.
재상에 재임한 기간은 총 27년 정도지만, 무려 5개의 왕조에서 그는 재상을 지낸 것이다. 그 중에는 심지어 한족이 아닌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서도 재상을 했으니 단순히 관운이라고만 하기에는 그 이상의 엄청난 것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다보니 후세에 풍도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오죽했으면 한족을 정복한 거란족의 황제조차 탐냈던 인물’, ‘단지 왕에게 충성하지 않고 백성을 생각했던 진정한 재상’, ‘왕조를 엄어선 진짜 일꾼’ 등등 긍정의 평가도 적지 않지만, ‘염치도 지조도 없는 간신’, ‘충성심보다는 개인의 영달에만 목맨 변심의 귀재’ 등 혹평도 많다.
두 가지의 극명한 평가에서도 볼 수 있지만, 풍도의 인생 역정, 정치 경륜은 1000년이 지난 지금의 범인으로서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 충신이라기에는 너무 많은 왕조를 섬겼지만, 간신이라고 치부하기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제왕들이 그를 귀하게 썼던 것이다. 단지 일신의 안위를 위한 정치를 했을 때 이런 결과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오언절구의 싯구는 이 불세출의 재상 풍도가 지은 것이다. 전당서(全當書) 설시(舌詩)편에 나온다.
“입은 불행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숙이 감추면, 곳곳에서 몸이 편할 것이다.”
인생사에 새길만한 글일 수도 있지만, 저자인 풍도가 평생 정치인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촌철살인일 것이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입조심, 말조심하라는 얘기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조선조 연산군은 자신의 환관들과 대소신료들에게 이 글귀를 적어 허리춤에 차고 다니게 했다는 말도 있다. 연산군의 의도야 자기에게 말조심하라는 뜻이겠지만.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예비 후보가 하루가 멀다 하고 구설수다. 적진인 민주당뿐 아니라 엄밀히 따지면 아군인 같은 당 홍준표 유승민 예비후보들도 ‘1일 1망언’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그나마 ‘실언’이라고 치부해주는 이들은 윤 후보를 위하는 사람들이다. ‘망언’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실제 그가 구설수에 올랐던 말 중에는 ‘실언’이라고 할 수 있는 말도 있지만, 본인의 의지와 신념을 담아서 한 얘기가 우리 사회의 보편 정서와 부합하지 못해 문제가 된 것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이런 경우 ‘망언’이라고 더 강력한 비판을 받는 것이다.
‘120시간 노동’이나 ‘가난한 사람 부정식품’,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 안 됐다’거나 ‘청약통장 모르면 치매 환자’ 등의 말들이 그렇다. 가장 최근 ‘전두환 옹호’ 발언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우리 사회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어’를 건드린 것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5.18을 저지른 전두환에 대한 옹호는 일본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거나 일본군 위안부를 비판하는 것만큼이나 민심에 생채기를 내는 일로 치부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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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사진=윤석열 전 검찰총장 측 선거캠프 제공 |
그럼 윤 후보는 왜 이런 이야기들을 해서 물의를 일으키는 걸까? 일각에서는 의도된 정치 행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치 신인이 좀 더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문제가 될 소지를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그런 말을 함으로써 언론 노출도도 늘리고 대중들의 뇌리에 강한 의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득력 없는 얘기다. 윤 후보는 이미 지난 몇 달간 가장 주목받는 대선 주자다. 굳이 그가 그런 ‘의도된 물의’를 일으키지 않아도 그의 말 하나하나, 동선 하나하나는 거의 모두가 기삿거리다. 아마 지난 몇 달간 빅데이터상으로도 가장 많이 언급된 게 윤 후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현실 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정치 신인이 ‘정치적’으로 말하는 법에 서툰 탓이라고 볼 수 있다. 확고한 자기 신념과 의지가 정치적 화법으로 한 번 굴려진 후 입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는 아직 그런 ‘재주’를 덜 배운 탓일 것이다.
그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현재 그가 처한 처지가 그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이미 1등 후보의 지위에서 밀려났다. 여론조사들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상당히 많은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에게 밀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같은 당의 경쟁자인 홍준표 후보에게도 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국민의힘 후보 중 이재명 후보의 상대로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평도 받고 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의 입 밖으로 나와 떠들썩했던 말들이 큰 요인이라는 걸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은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 이제 채 열흘도 남지 않은 시점이다. 윤 후보가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되고자 한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말하기’와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하다. 만약 캠프 내에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싹 갈아치워야 한다. 연설이 아닌 후보의 입에서 즉석에서 나온 말들이 문제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윤 후보와 평소 소통이 잘 안 되고 있다는 뜻이고, 한두 번도 아닌 일이 반복된다면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인기 배우 라미란 씨가 주연을 맡았던 ‘정직한 후보’라는 영화가 있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던 3선 국회의원이 어느 날 하늘의 조화로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면서 “나는 서민의 일꾼이다”가 아니라 “서민은 나의 일꾼이다”를 외친다. 영화 제목은 ‘정직한 후보’지만, “서민은 나의 일꾼”이라고 외치는 것은 솔직한 것일 수는 있어도 정직한 것은 아니다.
윤석열 후보가 외치는 말들의 상당수는 ‘솔직한 말’들로 보인다. 문제는 시민들이 그걸 ‘정직한 말’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 후보는 솔직한 말을 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정직한 말을 하는 정치인이어야 대선 가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치 초년생’ 윤석열은 본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주변 참모들의 그런 ‘정치적 조언’을 받고 ‘진짜 정치인’이 돼야 한다. 그의 주변이 그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다면 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는 ‘큰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풍도는 재상이지 황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은 5개의 왕조에서 여려 명의 황제를 만들기도 했고, 받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조언은 지금 그 누구보다도 윤석열 후보에게 필요하다.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閉口深藏舌(폐구심장설), 安身處處牢(안신처처뢰)’ 윤석열 본인은 물론 그 참모들이 허리춤에 글씨를 써서 차고 다녀야 한다.
[미디어펜=이석원 정치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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