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정 외교안보팀장
[미디어펜=김소정 외교안보팀장]일제강점기 온 민족이 하나가 되어 독립만세를 불렀던 3.1운동 이후부터 우리에겐 독립운동에서도 좌우가 나뉘었던 역사가 있다. 해방 된 한반도에서도 좌우가 대립하면서 북한에 소련군, 남한에 미군을 불러들였고, 끝내 남북은 각각의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했다. 남북은 서로 상대방의 지역을 반국가단체가 불법적으로 점령한 곳으로 간주했고, 언제라도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기회만 엿보던 중 1950년 6월 25일 북한에 의해 한국전쟁을 맞았다.  
         
한반도에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됐지만 이념으로 갈라진 남과 북은 각각 ‘멸공’ ‘혁명’을 외치면서 정통성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서로 다른 체제를 용납하지 못하는 불신의 이유도 컸지만 남북한 모두 정권을 잡은 이들이 체제 대립을 자신들의 권력기반 강화의 계기로 삼았던 탓도 있다는 역사적 평가가 있다. 결국 남북의 화해없이 미군과 중국군이 서명한 휴전협정은 68년이 흐른 지금 남북 합의만으로 종전선언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낳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월 유엔총회에서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의 종전선언을 제안한 이후 한달동안 한미는 전례 없는 잦은 접촉을 이어가며 협의해왔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10월 초 파리에서 CECD각료이사회를 계기로 접촉했고, 서훈 국가안보실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났다.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성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9~10월 5차례나 한미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진행했다.

급기야 한미가 종전선언 문안 조율에 들어갔다는 말이 전해지면서 문재인정부 임기 안에 종전선언이 타결될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나왔다. 그런데 돌연 미국측에서 “시각차”가 언급되면서 반전 조짐이 감지됐다. 설리번 안보보좌관이 “시기와 조건에서 다소 시각차가 있다”고 한 말은 사실상 종전선언에 대해 조 바이든 정부가 처음 내놓은 입장이었고, 그런 만큼 종전선언은 한미 간 합의도 간단치 않은 문제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 남북미중 종전선언 (PG) 박은주 제작 사진합성·일러스트./사진=연합뉴스

여기에 북한은 종전선언 논의에도 ‘조건’을 내걸었다. 앞서 2019년 2월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앞으로 자신들과 쉽게 마주앉을 수 없을 것이라며 내걸었던 ‘대화의 조건’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어 심상치 않아 보인다. 현재 남북미 입장을 정리해보면, 북한은 자신들과 대화할 수 있는 첫째 조건을 대북 적대시정책 철회라고 설명해왔다. 한미는 북한의 적대시정책 철회 요구에 종전선언을 가장 유용한 방안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적대시정책 철회를 요구하면서 종전선언 논의 테이블에 나서지 않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종전선언이 아무리 상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유엔사 문제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 법률적 검토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그래서 종전선언에 여러 조건을 붙이는 문안 작성에 골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이 종전선언 논의에 좀처럼 나서지 않는 것은 정작 다른 요구를 감추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사실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북한 당국이 더 이상 이 조건을 입에 담은 적은 없지만 북이 가장 원하는 것은 여전히 대북제재 해제일 것이다.

마침 국가정보원은 28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북한이 종전선언 논의 선결 조건으로 한미연합훈련 중단 외에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했다”고 전했다. 구체적으로 광물 수출 및 석유 수입 허용이라고 한다. 북한은 ‘하노이 악몽’을 씻으려는 듯 비핵화 협상 재개없이 제재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평화협정은 휴전 체제가 지켜져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단계이다. 아무리 정치적 선언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로드맵 합의없이 68년만에 종전선언 추진, 과연 괜찮을까. 
[미디어펜=김소정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