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지호 기자]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 본격 개막하면서 투자자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올해 주총은 전자투표제의 도입으로 그 어느 때보다 소액주주의 목소리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그간 ‘관치 논란’에 의결권 행사를 자제했던 국민연금이 자세를 바꿀지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래저래 기업 입장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껄끄러운 주총 시즌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9일 재계와 한국거래소 등에 따르면 13일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화학, 포스코, 신세계 등 68개사가 대거 주총을 여는 것을 비롯해 이달 중 코스피·코스닥시장에 상장된 738개사가 주총을 개최한다.
이번 주총의 가장 큰 변화는 전자투표제를 채택한 기업들이 대거 늘어났다는 점. 지난해 79개사였던 전자투표도입 기업이 올해는 260개사로 급증했다. 전자투표제 실시로 소액주주들은 제 목소리를 내기가 한층 쉬워질 것으로 보인다. 주주총회장까지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인터넷 전자투표시스템에 접속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악성주주가 등장하거나 의결권이 분산되면서 주총결의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는 부작용도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보통결의엔 전체 주주의 25% 이상 참여에 참석주주 과반수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기업에 부담을 주는 것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이 266개사에 달한다. 국내 주식시장 투자금액만 84조원에 이른다. 국민연금은 이번 주총 시즌을 앞두고 기업의 의안을 분석하는 외부 자문기관을 선정하는 등 강한 의결권 행사를 예고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이 합병을 추진하면서 주식 가치가 떨어지자 국민연금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해 양사의 합병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삼성중공업 지분을 5.05%에서 4.04%로, 삼성엔지니어링 지분을 5.90%에서 3.96%로 각각 낮춰 주요주주 지위에서도 벗어났다. 이에 양사의 합병이 재추진된다면 이번에는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올해 주총에서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의결권 행사에 나설 경우 기업의 경영의사결정을 사실상 정부가 하게 돼 관치 논란이 재연될 수도 있다는 점도 국민연금에는 짐이다.
특히 정부가 꾸준히 기업의 배당확대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연금의 기업에 대한 배당압박은 거세질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 기업의 배당수익률은 1.3~1.5%에 불과해 세계 배당수익률 평균인 2.5%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다만, 지난달 26일 열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재계 측 기금위원들이 “경영권 간섭”이라면서 집단 퇴장, 배당 확대와 관련한 정부안 처리가 보류된 상태다. 국민연금은 3%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에 대해 배당 적정성을 판단하는 지침을 만들고, 적은 기업은 ‘중점 관리기업’으로 지정해 배당 확대를 유도한다는 ‘국내주식 배당 확대 추진 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미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를 비롯한 대다수의 기업이 배당을 40%에서 많게는 100%까지 올리기도 결정, 이번 주총에서 승인을 받게 된다. 기업의 배당확대 추세는 국민연금의 의도대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주총에서 기업의 신사업 확대안도 승인될 것으로 전망된다. 저성장에 허덕이고 있는 기업들이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을 위해 신사업을 대거 안건으로 상정한다. SK텔레콤은 '수출입업과 수출입 중개·대행업'을, SK C&C는 경비 및 보안시스템 서비스업, 검사·측정 및 분석업을 새로 넣었다. SK네트웍스는 평생교육시설 운영업을 신사업으로 추진한다. 삼성그룹의 제일모직은 조경관리 사업을, 신세계는 신세계건설을 통해 공중목욕탕, 수영장, 고급 사우나업 등을 새로운 먹거리로 추가할 예정이다.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기업의 경영권 향방도 국민연금이 좌우할 것으로 판단된다. 넥슨과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엔씨소프트는 김택진 대표의 임기가 만료되는 상황에서 김 대표의 재신임 여부가 관심사다.
김 대표(9.9%)보다 많은 엔씨소프트 지분을 보유한 넥슨(15%)은 지난달 지분보유 목적에서 경영 참여를 선언했고 이사선임 등 내용이 담긴 주주제안서를 엔씨소프트에 전달한 상태다. 국민연금의 엔씨소프트 지분율은 6.88%로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서 김 대표의 재신임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
이밖에 현대차가 이동규 전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과 이병국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등 이번 주총에서 기업의 사외이사 선임도 대거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대신경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주총 소집을 공고한 126개사의 안건 중 사외이사 신규선임 건은 86건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