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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광화문] 기다리던 봄이었으면
편집국 기자 | 2022-02-03 15:03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봄이 오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에는 벌써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아직 봄의 햇살을 기다릴 뿐 누리지 못하는 즈음입니다. 누구는 봄이 모르는 사이, 화들짝 놀라게 온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봄은 기다려야 올 것입니다. 


주머니 얇아 옷이 가벼운 이들이 햇살을 맞이하고, 마음속 냉기로 눈을 감은 이들이 눈을 여는 봄은 기다려야 오는 듯합니다. 영하의 입춘부터 손가락을 접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 눈부신 봄날을 맞겠지요. 사실 기다리는 인식의 부재 중 속절없이 들이닥치는 봄은 여름을 향하는 손님 같을 겁니다. 


우리 기억 속 기다림의 인물은 강태공 강상입니다. 강상은 바늘없는 낚싯대를 물에 드리우고 시대를 낚았다지요. 역사서를 겹쳐 읽으면 강상이 잡히지 않는, 아니 잡을 생각도 없이 낚싯대를 쳐다본 세월이 10년 이었다고 합니다. 또 10년의 시간이 지나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인 주(周) 문왕(文王)을 만난 당시 나이가 80세였다고 합니다. 이어 문왕의 아들인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토벌하고 주나라를 세우고 제(齊) 땅을 봉지로 받을 때는 이미 90세가 지났다고 합니다. 


중국 고대사를 관통하는 춘추필법을 감안하더라도 가히 기다림의 공력으로  세상을 얻었다고 하겠습니다. 


 
돌아오는 봄은 이랬으면 좋겠다. 봄의 생명력이 정치를 살리고, 경제를 살리고, 무너진 아파트를 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스크 뒤로 사라진 우리의 관계도 봄꽃처럼 활짝 피었으면 한다. /사진=미디어펜DB


실수를 통해 기다림을 신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입니다. 맞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이자 글쓰는 이들의 영매이기도 한 그 카잔차키스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나뭇가지에 붙어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본 기억이 났다. 나비는 번데기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린 나는 너무 오래 걸릴 것같아 입김으로 열심히 데워 주었다. 그 덕분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왔다. 그러나 날개가 뒤고 젖혀지고 구겨진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가엾은 그 나비는 날개를 펴려고 안간힘을 썼고 나도 도우려고 입김을 불어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면서 날개를 펴는 일은 태양아래서 천천히 진행돼야 했던 것이다.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내 입김 때문에 때가 안된 나비가 집을 나선 것이었다. 나비는 몸을 파르르 떨고 몇 초 뒤에 내 손바닥 위에서 죽었다.<더클래식, 2012>"


어쩌면 기다림은 무작위의 이어짐이 아니라 해산을 예고한 산모(産母)같은 창조의 예비동작일지 모르겠습니다. 봄은 이런 기다림을 통해 우리에게 왔으면 좋겠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부조리한 허망함이 아니라 온 몸으로 체감되는 눈부신 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냉전을 녹였던 프라하의 봄도, 독재를 불살랐던 리비아의 봄도, 민주주의 전령인 서울의 봄도 모두 봄의 이름으로 왔지만 흔적만 남긴 채 아지랑이처럼 사라졌습니다. 봄이 주는 나른함에 취한 순간이었습니다. 봄이 오면 세상이 저절로 좋아질듯 한 착각에 불의, 불공정, 부조리에 눈감게 된다면 아마 그 봄은  기다리던 우리들의 봄은 아닐 것입니다. 


봄이 오면 눌린 것이 펴지고, 막힌 것이 열리고, 고통이 치유되고,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면 좋겠습니다. 모든 눈물이 웃음으로 바뀌지는 않더라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상을 꿈꾸는 봄이면 좋겠습니다.


봄이 주는 생명력이 정치를 살리고, 경제를 살리고, 무너진 아파트를 살렸으면 좋겠습니다. 마스크 뒤로 사라진 우리의 관계가 살아나는 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봄이라면 벌써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집니다.


"네가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어린왕자 中>"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미디어펜=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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