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하청업체 ‘기술탈취’, 시장경제에 ‘암 덩어리’
   
▲ 윤광원 세종취재본부장/부국장대우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윤석열 새 정부는 친 기업과 규제혁신을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윤 대통령으로부터 첫 공정거래위원장으로 낙점 받은 송옥렬 공정위원장 후보자는 경쟁법이 아닌 상법의 권위자로, 그 동안 공정위에 각종 기업규제 완화를 꾸준히 요구해왔다.

송 후보자는 지난 5일 기자들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3가지를 강조했다.

시장에서 공정경쟁을 저해하는 ‘반칙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히 대응하고, ‘경쟁제한적인 규제’ 혁신, 중소기업과 소비자 및 우리 경제의 ‘약자’들에 대한 보호가 그것이다.

특히 그는 중소기업의 ‘기술탈취’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우리 산업계에서는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하도급업체(하청업체)의 기술자료를 유용하고 빼돌리며, 심지어 경쟁업체에 넘겨버리는 불공정 행위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게 현실이다. 이럴 경우 하청업체인 중소기업은 ‘존망의 위기’를 맞게 마련이다.

공정위는 지난 4월 전기자동차 배터리를 생산하는 A 대기업이 하도급법을 위반했다며,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2억 7000만원을 부과했다.

2억 5000만원이 직접적인 기술자료 유용 행위에 대한 과징금이고, 2000만원은 기술자료 요구 시 반드시 제공해야 할 서면을 교부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제재다.

A사는 자사가 최대 주주인 중국 합작법인과 관련된 현지 협력사의 요청을 받고, 하청업체가 보유하고 있던 기술자료를 제공했다.

현행 하도급법에 따르면, 원사업자는 수급사업자(하청업체)에게 기술자료를 요구할 경우, 요구 목적과 그 정당성, 비밀 유지에 관한 사항 등을 기재한 서면을 제공해야 한다.

또 원사업자가 취득한 수급사업자의 기술자료를 부당하게 자신이나, 제3자를 위해 사용하거나 제3자에게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같은 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정거래조사부는 하청업체의 선박용 조명기구 제작 도면을 경쟁 하청업체에게 부당 제공한 혐의로, 국내 굴지의 조선회사 법인을 기소했다.

이는 중소벤처기업부의 ‘고발 요청’을 받고, ‘전속 고발권’을 가진 공정위가 검찰에 고발한 사건이다.

이 조선사는 지난 2017년 4월부터 2018년 6월까지, 55개 하청업체에 선박 관련 제작도면 125건을 요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2개 하청업체 제작도면을 4차례의 입찰과정에서 경쟁업체들에게 제공, 사용하게 하는 ‘파렴치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도면을 요구하면서 목적, 비밀유지에 관한 사항, 권리귀속 관계, 요구대상 기술자료에 대한 대가 등 법정사항을 기재한 서면도 교부하지 않았다.

   
▲ 송옥렬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사진=공정위 제공

이런 사례들에서 보듯, 아직도 많은 중소기업들이 이런 대기업의 ‘갑질’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하청을 주는 대기업과 수탁 받는 중소기업 간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피해사실 입증이 쉽지 않고, 어렵게 소송을 진행하더라도 가해 기업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기술탈취와 관련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피해 입증 책임을 하청업체에게 지우지 않고 가해자인 위탁 기업으로 전환시켜, 원청업체가 자신의 행위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또 소송 과정 전체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지 않도록, 미국과 영국의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증거개시 제도라고도 하는 이 제도는 재판 개시 전에 양측이 가진 증거와 서류를 서로 공개, 원고의 ‘증거 확보권’을 보장한다. 재판부의 증거개시 명령에 불응하거나 허위 제출하면, 형사 처벌이나 패소 판결을 받는다.

사건처리비용도 해소해야 할 ‘장애물’이다.

중기벤처부가 2020년 실시한 실태조사에서, 중소기업 10곳 중 4곳은 기술유출과 탈취가 발생하더라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들 중 38.9%는 법률비용 부담을 이유로 들었다.

분쟁의 상대방이 주요 거래처일 경우, 아예 일감이 끊길 것을 각오해야 한다.

전문 법무팀이나 대형 로펌이 있는 대기업을 중소기업이 이기기도 어렵다. 오랜 법적 분쟁에도 불구, 경제적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채 사업을 정리하거나, 폐업에 이르기도 한다.

‘경제검찰’이 필요한 이유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손해배상 판결액을 비교해보면, 우리 사법부가 대기업의 기술유출·탈취 행위에 대해 ‘솜방망이’ 판결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 극명하게 확인된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한국의 특허 손해배상액 평균은 6000만원인 반면, 미국은 65억 7000만원에 달한다.

무엇보다 기술유출이나 탈취 행위에 대한 엄정한 형사 처벌이 필요하다.

2011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관련 1심 판결 중 유기징역형은 전체 115건 중 13건에 그쳤고,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로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국내 영업비밀 침해행위에 대한 기본 양형기준은 8개월에서 2년, 가중 기준도 최장 6년인데 비해, 미국은 15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하거나 해외 추방까지 이뤄지고 있다.

대기업이 하도급 거래과정에서 하청 중소기업의 기술을 무단으로 유출하거나 탈취하고, 단가를 일방적으로 후려치는 관행은 피해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혁신기술 개발 동기가 꺾일 뿐 아니라, 사업을 포기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런 ‘횡포’를 모른 체 하는 것은 친 기업이 아니라 '특정 기업 편애’가 될 것이고, 결국 자유시장경제에 ‘암 덩어리’가 될 것이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