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기업이 미래다>-①'진짜 경쟁'의 힘, 독일에서 배운다(상)

과거엔 크기가 중요했다. 크다는 것은 이윤과 성장을 의미했다. 공급을 지배하고 시장을 지배한다는 뜻이었다. 가치라는 것이 큰 조직에 적합한 방식으로 부가됐기 때문이다. 가치는 효율적인 공정과 광범위한 유통, 대규모 연구개발에 의해 증가했다. 대기업은 주식을 공개함으로써 자금을 더 많이 확보해 한층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다. 최근 우리나라에선 성장동력으로 중소(중견)기업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추세는 강한 중소기업이 국가경제를 이끌고 있는 독일을 비롯해 미국, 일본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들 국가의 정책적 공통점은 해외진출 활성화를 중소기업 발전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한다는 데 있다. 중소기업 해외진출은 수출증대는 물론 기업의 세계화 촉진과 성장을 만들어낸다. 특히 국내 고용창출에 기여함으로써 국가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 중소기업이 신흥시장을 중심으로 수출과 투자를 다각화하고 있지만, 그 비중은 오히려 줄어드는 추세다. 금융위기 이후 주요 선진국이 안정적 경제성장을 위한 방안으로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을 강화하는 지금, 이들의 동향을 살피고 우리 정부와 중소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아본다. <편집자주>

   
 

[미디어펜=김세헌기자] 독일은 제조업 강국이자 수출 강국으로서 지속적인 연구개발(R&D) 지출 확대와 기업·학계 간 협력을 통해 높은 산업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 나라로 꼽힌다. 

독일연방정부는 장기적인 로드맵을 바탕으로 하이테크전략과 이후 신하이테크전략을 비롯해 '인더스트리 4.0' 등의 정책을 활발히 펼쳐왔다. 이러한 정책에 대해 민·관·학의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공동참여가 이뤄지고 있다.

현재 정부정책에 대한 독일 중소기업의 만족도 평가 역시 점차 향상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독일연방정부는 이러한 정책을 통해 과학과 산업 간 연계성 강화는 물론 궁극적으로 글로벌 경쟁에서 독일의 선두적인 지위가 지속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규제, 중소기업 적합여부 검증…가업승계, 금융·세제지원 활발

한독상공회의소와 독일연방상공회의소에 따르면, 국제사회에서 독일이 중소기업 강국으로 꼽히는 가장 큰 비결은 바로 합리적인 법체계다. 독일은 관료주의에 의한 비용과 폐해를 줄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특히 새롭게 도입하는 규정이 중소기업에게 적합한지를 우선적으로 점검해 이들 기업의 경영활동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독일 중소기업의 가장 큰 특징은 가족기업이라는 점이다. 가족경영은 기업이 위치한 지역과의 긴밀한 연계, 근로자와의 끈끈한 유대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들 기업은 여러 세대를 걸쳐 성장해 기업규모가 커지더라도 기업에 대한 책임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이에 경영자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단기적인 수치나 실적보다는 장기적으로 그 후손 또는 후임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심사숙고하게 된다고 한다.

중소기업 지원 인프라 역시 이러한 장기계획에 맞춰져 있어 가업승계가 원활히 일어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다.

   
▲ 독일 중소기업은 혁신과 기술력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있어 서 EU 평균을 상회하고 있다. 또한 금융접근성, 기업 환경 역시 EU 평균 수준을 크게 상회하고 있으며, 해외진출(국제화) 측면에서도 독일은 EU 경쟁국들을 앞서고 있다. / 자료=유럽위원회(European Commission, 2014)

독일 중소기업은 대도시가 아닌 지방과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지방정부와 자치단체는 ‘경쟁’을 통해 자기지역 기업에게 더 많은 인센티브와 유인메커니즘, 풍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이른바 ‘기업하기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성공적인 중소기업 문화를 만들기 위해 제도적 장치와 정치적 제반 마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독일에선 자산에 부과되는 모든 종류의 세금이 중소기업의 건강한 발전에 독이 된다는 의식의 팽배해 있다. 이런 관점에서 2008년 개정된 독일의 상속세제는 중소기업의 가업상속 부담을 획기적으로 낮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일은 가업상속 후 경영기간과 고용유지 규모에 따라 가업상속자산의 85~100%를 한도 제한 없이 공제하고 있다. 가업상속 후 5년 간 가업을 영위하며 지급한 급여총액이 상속 당시 급여지급액의 400% 이상이면 85%를 공제하고, 7년간 가업을 영위하며 지급한 급여총액이 상속 당시 급여지급액의 700% 이상이면 100%를 공제하는 식이다.

글로벌시장 절대강자…주변국도 강한 중소기업 많아

2008년 금융위기에 앞서 독일은 주변국으로부터 비판의 대상이었다. 지나치게 제조 부문에 의존하면서 서비스 사회로의 이행에 있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독일 GDP에서 생산 및 제조 중심의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고도로 발전된 다른 국가들보다 더 높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2008년 위기 이후로 이런 비판의 시각은 완전히 뒤집혔다. 소위 서비스 강국이라 자부하는 영국, 프랑스, 미국 같은 나라가 경제적 위기에 크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제조업으로 기반으로 한 독일 중소기업의 신화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시작됐다. 중소기업은 1950~1960년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독일경제의 숨은 동력으로 평가된다.

   
▲ 세계산업은 바야흐로 제4차 산업혁명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른바 '인더스트리 4.0'의 중심에는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3D프린팅 같은 기술들이 존재한다. 이미 이런 일련의 기술은 상용화 단계에 이르렀고,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앞다투어 기술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세계는 독일의 '인더스트리 4.0'에 주목하고 있다. 바로 독일 '인더스트리 4.0'의 핵심기반기술인 사이버물리시스템(CPS, Cyber-Physical Production Systems)때문이다.

당시 중소기업은 직접수출은 물론 독일 내 대기업에 부품과 소재, 서비스 등을 대거 공급했다.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는 해외수출에 기여했고, 경제 부흥을 이끈 실질적인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다.

독일 중소기업이 세계시장 속에서 이른바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이 되면서 독일 내에서도 커다란 영향력과 그 입지를 구축해왔던 배경은 무엇일까. 바로 중소기업만이 보유한 강력한 기술경쟁력과 체계적인 기술인력 육성제도, 특히 국제화에 대한 선제적인 태도가 꼽힌다.

1986년 사상 최초로 수출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로 독일은 전세계적인 경쟁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해왔다. 제품이 지닌 높은 명성과 품질, 단위노동비용의 온건한 상승, 강력한 생산기반과 이원적 직업교육 시스템 등은 독일의 수출 성공을 유지시킨 원동력으로 평가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독일에 히든 챔피언이 많은 이유는 19세기 말까지 군소국가집단으로 이뤄져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는데, 당시 성장을 꾀했던 기업들은 국제화를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가령 바이에른 기업이 작센이나 뷔르템베르크에 있는 고객들에게 남품을 하는 경우, 이는 국제무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개방성과 국제화 역량이 생성됐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 미국, 중국 등과 일찍이 무역을 시작함으로써 유럽과 전세계를 아우르는 규모로 성장했다.

   
▲ 독일 쾰른에 위치한 대표적 강소기업인 이구스(igus). 이곳은 축구장 3개를 합쳐놓은 크기의 광활한 생산 공장을 작업자들이 전동 스쿠터로 빠르게 이동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미디어펜 자료사진

독일의 많은 지역은 전통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보유했고,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슈바르츠발트 지역에선 수백년 전부터 시계를 만들어왔는데, 융한스와 같은 소수의 기업을 제외하곤 모두 몰락했다.

하지만 정밀기계학적 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산업이 생성됐다. 슈바르츠발트 지역의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투틀링엔에는 현재 의용공학 분야, 특히 외과용 기구 제조 기업이 400여개에 이른다.

독일의 경우 대부분 분야에서 경쟁이 무척 치열하다.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들을 보면 흔히 다수의 강력한 지역 라이벌이 있기 마련인데, 독일의 경우 대부분 분야에서 열띤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독일의 모든 주에는 히든챔피언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베를린, 함부르크, 브레멘을 제외한 나머지 주에 특히 많이 분포돼 있다.

다른 나라와 달리 독일은 각 지역의 인재들을 활용하고, 그들을 지역 중심뿐만 아니라 각각의 해당 지역에 배치하는 데 좀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

독일 특유의 이런 분산 현상은 커다란 장점인 동시에, 이 나라에 많은 수의 히든 챔피언들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탁월한 수출 성적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독일뿐만 아니라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경우에도 히든 챔피언들이 나라 전체에 고르게 분포돼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관계자는 "주요 선진국이 1990년대 후반 이후 예외 없이 탈산업화를 겪는 가운데서도 독일은 탈산업화 속도나 수준에서 가장 양호한 상태를 보이고 있다"며 "중국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미국, 중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의 제조업 강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또 "독일은 전 산업에 걸친 중소기업의 역할이, 다른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에도 상대적으로 크다고 할 수 있으며, 기업 수 기준으로 전체 기업의 99.7%가 중소기업이고 독일 경제 전체 부가가치 생산 및 독일 기업 전체 매출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50%와 40%를 넘든다"며 "독일 수출에서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업 범주는 소위 '히든 챔피언'이라고 불리는 매출액 기준 5000만 유로 이상의 중견기업이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