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지호 기자] “삼성물산 소액주주 입장에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겠지만, 법적으로 합병결정에 시비를 걸 거리가 없죠. 합병할 때 잠깐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제일모직과의 합병으로 시너지효과가 좋을 겁니다. 지금 손해 보는 듯해도 5~10년 후에는 합병이전 이상의 이익을 볼 거예요. 삼성물산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다고는 하지만, PBR 1배 아래인 종목이 많습니다. 코스피 전체의 PBR도 1배 정도 수준입니다.”

이상진 신영자산운용 대표(사진)는 미디어펜과 가진 인터뷰에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논란을 두고 “합병비율보다는 합병이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신영자산운용은 삼성물산의 지분을 보유한 운용사 중 일찌감치 합병에 찬성한다는 의사를 명확히 밝혀 눈길을 끌었다. 의도적으로 삼성물산의 주식을 낮춘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자본시장법에 의한 제일모직-삼성물산의 합병비율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지적이다.

“현재 셀트리온 시가총액이 KT보다 큽니다. 셀트리온을 팔면 KT를 사고도 몇 조원이 남아요. 순자산이 많다고 반드시 주가가 높게 평가되는 것은 아니죠. 합병비율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기준이 되는 자본시장법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는 있어도 삼성 측에는 위법 사항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 대표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에 대한 중립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해외 헤지펀드도 돈을 벌기 위해 투자를 하는 것인 만큼 위법적인 투자가 아닌 이상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다는 것. 투자는 결국 회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먹튀’라고 비판하는 것도 부적절하다는 설명이다.

이 대표가 이처럼 자본시장에서도 법적인 기준을 강조하는 것은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지방 출신 수재들이 그렇듯 야망을 품고 서울법대에 들어갔지만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에게 육법전서를 반복해서 읽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래서 대학시절 고시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서울법대 출신이 가득한 법조계에 가도 별다른 경쟁력을 발휘할 수 없겠다는 회의도 고시공부를 멀리하게 한 이유 중 하나였다. 당시 고시를 준비하지 않던 서울법대 출신들이 주로 가던 곳이 한국은행, 외환은행이나 보험사 등 금융권이었다.

평소 중화학공업에 관심 많았던 이 대표는 과감하게 제조업체인 현대중공업을 선택했다. 법대 출신이 드문 제조업으로 가면 좀 더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회사에 들어가 보니 서울법대 출신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물었죠. 사장님을 비롯한 임원들도 ‘어디서 이런 놈이 들어왔냐’ 하면서 금방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선박영업 업무도 열심히 해서 회사 어디에서도 인정받는 사원이 됐죠. 고시를 준비해서 판사가 됐으면 서울법대 나온 걸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사람은 항상 자신의 존재가 부각될 수 있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현대중공업에서도 슬슬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박을 제조하는 현대중공업에서는 사장이 되거나 출세하려면 조선이나 기계를 전공해야했다. 법대나 상대 출신은 제조업에서 고위직에 올라가기 어려웠다.

본사가 울산이라 가족과 떨어져 울산에서 살아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현대중공업에서 출세하려면 무조건 울산에서 평생을 살아야했다. 서울 출신인 아내는 울산에서 사는 것을 반대했다.

고심 끝에 업종을 전환하기로 했다. 서울법대 출신들이 많이 갔던 금융권으로 눈을 돌렸다. 현대중공업 시절 선박 파이낸싱을 담당하면서 금융업을 공부했던 터라 그리 낯설지 않은 분야였다. 마침 미국에 이어 한국에서도 막 증권업이 성장하려는 추세여서 사람이 필요했다.

“법대 나온 사람이 조선업에서는 한계가 있었죠. 그러던 차에 1987년 신영증권에 입사했습니다. 이전에는 증권업을 상고 출신들이 했어요. 지금은 큰 증권사 직원이 수천 명씩 되지만 당시에는 잘해야 400~500명 수준이었고 점포 하나를 열려고 해도 정부의 승인이 필요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증권업이 붐을 일으키면서 이 대표가 입사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수작업으로 체결되던 증권거래도 빠르게 전산화됐다. 1990년대 들어 해외와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신영증권에서도 국제부를 신설했다.

모두 상고출신이라 영어를 좀 할 줄 알았던 이 대표가 국제부에서 영어로 시황을 쓰고 외국투자가에 보고서를 보냈다. 그의 깊이 있는 증시 분석에 영국계 운용사인 슈로더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4년 간 슈로더에서 일하고 다시 신영증권으로 돌아와 신영자산운용(당시 신용투자신탁운용) 설립멤버가 됐고 2010년에는 대표까지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