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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꿈꾸는 사람이었다. 가난과 함께 생활했지만 꿈을 버리지 않았다. 선각한 이들이 그렇듯 현재보다 내일을, 자신보다 타인의 삶을 고민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그것도 안락한 삶이 보장된 치과대학을 다녔으나 초개처럼 여기고 함께 살아가는 꿈을 꾸었다. 신념대로 사느라 교도소를 들락였으니 대학졸업은 한참이나 늦었다.

그를 1996년 15대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만났다. 수도권인 안산에서 출마를 준비 중이던 그는 열정과 재기가 넘쳤다. 정치인이라고 하기에는 빈 곳이 많았으나 기성 정치인에게 없는 순수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취재기자를 마치 오랜 동지로 여기는지 정치인이면 입을 닫는 이야기까지 서슴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준비가 덜 된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까발렸다. 자신을 발탁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부담되는 정치권 입문 과정 또한 털어놓았다. 가리는 게 없이 솔직하니 오히려 기자가 가려 써야 하는 특이한 경험이었다. 헤어질 때 한 권의 시집을 선물 받았다.

‘지난날의 꿈이 나를 밀어 간다’는 제목이었다. 얇은 두께였으나 첫 장부터 완독하지 못했다. 하지만 30대 초보 정치인이 품은 이상을 제목으로 적확하게 표현했다고 감탄했던 기억은 또렷하다. 그의 시집은 고준담론을 담지 않았다. 또 투사의 열정으로만 나열되지 않았다. 자신이 살아 온 곡진한 삶이 쟁쟁거렸고 그 속에 꺾이지 않는 꿈이 녹아 있었다. 

캐나다 맥길대학 경제학 교수였던 스티븐 리콕은 “가장 많은 것을 이루는 자들은 가장 많은 꿈을 꾸는 자들”이라는 멋진 말을 남겼다. 격언이 예언이 됐다. 꿈 많던 그는 당시 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이 됐다. 이후 4선 국회의원을 거치는 동안 국회 상임위원장 등 요직을 경험했고 장관으로 양명했다. 이어 회전문을 몇 차례 돌더니 충청북도 도지사로 변신했다. 

   
▲ 김영환 충북지사가 산불이 진화되지 않은 때 음주를 했다는 구설에 올랐다.


김영환 충북지사가 입길을 타고 있다. 지난달 9일 언론은 “친일파가 되겠다”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김 지사의 발언을 부각했다. 정부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해법에 찬성하며 나온 이야기라고 한다. 국민의힘 소속인 김 지사가 정부의 방침을 지지하는 정치 행위는 탓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기꺼이 친일파가 되련다”라는 발언이 반어법이라는 주장은 낯설다. 감수성 예민하고 단어와 문장을 가려 쓰는 재주가 탁월한 김 지사의 화법으로는 궁색해 보인다. 특히 친일파 논란을 부른 SNS 글의 제목은 ‘내 무덤에도 침을 뱉어라’였는데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중의(重意)를 담고 있어 그의 노림수를 짐작케 했다.

개운찮은 뒷맛을 잊을만한 때 다시 김 지사가 구설에 올랐다. 이번에는 산불로 비상인 때 음주·가무를 했다는, 참으로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화제다. 지난달 30일 충북 제천 봉황산 산불이 잡히지 않은 채 밤을 맞아 진화용 헬리콥터가 뜨지 못해 인력만으로 사투를 벌이던 때 충주의 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했다는 소란이다. 김 지사는 “민심 청취의 도정활동이었지만 가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회한이 남는다”고 밝혔다. 당초 김 지사측은 술자리에서 물만 마셨다고 주장했다. 얼굴이 벌건 사진도 공개됐다. 김 지사측은 “술을 마신 게 아니라 햇볕에 그을려 붉게 보이는 것”이라는 애처로운 변명을 이어갔지만 김 지사는 막지 않았다.

하지만 관련 증언과 정황이 속속 드러나자 한발 물러섰다. 박진희 충북도의회 의원(더불어민주당)은 “김 지사가 당시 소주·맥주를 섞은 폭탄주 20여 잔을 마시고 노래를 하는 등 술판을 벌였다”고 주장하자 윤홍창 충북도 대변인은 “술은 한두 잔 마셨고, 노래는 참석자들이 권해서 답가로 한 것일 뿐 술판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다만 윤 대변인은 “도지사와 도민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거짓 선동으로, 사법적 판단을 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 채 살아왔지만 늘 그에 대한 관심은 멀리 두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그를 낡게 했나 보다. 지금의 행장은 그가 지닌 지난날의 꿈과 멀어 보인다. 엄혹한 세상살이다. 정치라고 별다르겠는가.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일수록 다음 발을 내디딜 공간이 협소하고, 숨은 차오른다. 무엇보다 정치인의 소신이나 신념은 뒤로 밀리고 정치적 이해관계가 앞서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또 권력의 정점에 있는 정치인의 속사정을 모르면서 훈수 둘 일은 아닐 것이다.

하여튼 김 지사가 60대 중반의 나이가 되도록 현실 정치에 쓰임새가 있다는 것은 그의 정치력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수십 년간 그의 열정과 신념에 영감을 받아온 터라 당황스럽고 낭패스럽다. 정치의 좌우와 이해를 떠나 불꽃같이 살아온 눈부신 날이 저버리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쩌면 다시 못올 낭만에 대한 미련일지 모르겠다.
볼빨간 도지사는 아직도 꿈을 꾸는지 궁금하다.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 겸 주필
[미디어펜=김진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