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태우 기자] 정부와 정치권이 대내·외적인 악제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완성차 업계에 또 다른 폭탄을 안겼다.
BMW 화재 사태로 촉발된 여론을 빌미로 자동차 및 부품 제작사에 대한 징벌적 요소만을 강화하는 내용의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내놓은 것이다. 실적 부진과 강성노조의 압박으로 어려움을 겪는 완성차 업계지만 정부는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평가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국회 국토교통위원장인 자유한국당 박순자 의원은 최근 자동차 리콜 방안을 바꾸는 내용을 담은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국토교통부와 협의를 거쳐 발의된 이 개정안에 따르면 제작사에게 '자동차 결함이 없음을 입증하는 자료 제출 의무'와 자료 미제출 시에는 '결함이 있다는 추정' 규정이 신설됐다.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결함의 원인을 파악하고 시정 조치해야 하는 책임이 전적으로 제작사에게 있게 된다. 결함으로부터 소비자의 안전과 재산 등을 보호해야 하는 정부 당국의 책임을 제작사에게 떠넘긴 셈이다.
물론 제작사에 자료 제출 의무를 부과하고 미제출시 제재를 강화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리콜과 같은 행정 처분의 근거가 되는 조사 및 판단 등의 책임은 국가기관에 있는 게 법치 행정의 기본이라는 점에서 그걸 민간에 떠넘기는 건 부당하다는 지적이다.
◇정부기관 역할 그대로…제작사에만 책임 전가
자동차 업계에서는 이번 개정안에 대해 BMW 화재 사태 당시 관리감독 소홀로 비난을 받은 국토교통부가 이를 면피하기 위해 만든 전형적인 포퓰리즘 입법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발의된 개정안에는 제작사에게만 일방적으로 책임을 전가할 뿐, 정부기관의 역할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전문가들은 국내 유일 사고 분석과 결함 조사 연구 기관인 자동차안전연구원(KATRI)의 사고 조사 권한 한계 및 결함 조사 역량 부족으로 선제 대응이 사실상 곤란한 구조를 개선하는 게 우선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미국 NHTAS(도로교통안전국)처럼 국내 리콜 담당기관이 강력한 조사 권한 및 능력을 갖추고 자체적인 행정력을 키울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제조물책임법 등 민사책임 영역에서 소비자가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힘든 영역의 경우 입증 책임을 완화해주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를 행정 처분 영역까지 확대하는 것도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자료 제출을 하지 않을 경우 결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는 규정 역시 문제의 소지가 크다.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유죄로 추정한다'는 식의 논리와 다를 바 없으며, 결함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방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자동차관리법의 입법 취지와도 근본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개정안대로라면 제조사는 결함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해 리콜을 실시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으며, 결함 원인 불명으로 유효한 시정 조치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로 인한 혼란은 고스란히 소비자 피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리콜 범위 불명확…제작사-소비자 갈등 키우는 구조
리콜 요건의 대상과 범위가 불명확한데다, 규제 당국은 피해가 커지고 나서야 개입하는 사후약방문식 구조가 늑장 리콜로 이어져 소비자들의 피해를 더욱 키운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행 자동차관리법에서는 '자동차 또는 자동차부품이 자동차안전기준 또는 부품안전기준에 적합하지 아니하거나 안전 운행에 지장을 주는 등의 결함이 있는 경우'라고 리콜 요건을 모호하게 규정하고 있다. '안전 운행에 지장을 주는'이라는 모호한 규정이 제작사, 소비자, 관련 부처 간에 리콜 사안 여부에 대한 갈등을 조장하는 구조다.
자동차 업계 한 관계자는 "리콜 요건을 보다 명확히 하는 것은 물론, 초기 단계부터 규제 당국이 개입해 관리 감독할 수 있도록 제도화를 추진하고, 이를 기반으로 제작사와 국가기관이 상호 협의해 조기에 리콜 검토가 이뤄지도록 하는 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리콜 요건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사에 지나치게 가혹한 책임과 처벌이 부여된다는 점도 이번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의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개정안에는 '제작사가 결함을 알면서도 지체 없이 시정하지 아니하여 생명, 신체 및 재산에 중대한 손해를 입은 자가 있는 경우에는 그 자에게 발생한 손해의 5배를 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배상 책임을 진다'라는 규정이 추가됐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제작사의 책임성을 강화하고 소비자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도입 자체의 정당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정안대로라면 '제작사가 결함 없음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결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결함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작사는 징벌적 배상책임은 물론 대규모 리콜, 형사 책임까지 져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지체 없이'라는 표현 역시 은폐, 늑장 리콜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명확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는 리콜 처리 시점에 대한 논란과 분쟁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되고 실효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리콜 요건 명확화 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게 자동차 업계의 주장이다.
법리상 체계 정당성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도 있다. 민사법 영역의 손해배상책임 조항 자체가 공공의 안전을 다루는 행정법인 자동차관리법에 삽입되는 게 맞지 않다는 것이다.
◇수입차 업체에 적용 어려워…국내 완성차·부품사 역차별 우려
현재 논의 중인 개정안은 국내 제작사와 부품사들에게만 규제로 작용될 수 있다는 부작용도 우려된다. 수입 자동차 업체들에 비해 국내 업체들이 역차별을 당하는 셈이다.
수입차 업체들은 주요 연구시설과 생산시설 등이 해외에 있어 결함 여부 등을 판단하기 위한 담당기관의 수사 및 조사 등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실질적인 손해배상이 쉽지 않다는 현실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리콜은 국내 시장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글로벌 이슈 사항으로 파급 효과가 크다. 국내 리콜 사항이 미국 등 해당 국가의 판매 차량과 동일할 경우에는 해당 국가에 보고하도록 돼 있으며, 이에 따라 제조사 본국에서 리콜을 한 경우 해외 시장에서는 리콜 사안인지 여부가 불분명하더라도 리콜을 강제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특히 국내의 과도한 제재는 불필요한 통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규제 강화가 해외메이커입장에서는 시장 진입 장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해외 메이커는 본국에 통상 이슈를 제기할 수 있으며, 해당 국가에 진출한 국내 업체에 대한 보복적 제재가 가해질 수도 있다.
실제 한미 FTA 협상 시 미국은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국내 안전, 환경 기준의 완화를 요구해 관철시킨 바 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실효성 높은 리콜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소비자뿐만 아니라 제작사 모두에게 바람직하다"면서도 "현재 논의 중인 대로 제작사에게만 징벌적 요소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안이 도입되면 현 리콜 제도의 구조적 개선은 불가능하며, 최근 위기 상황에 처한 국내 자동차업계에게만 피해가 돌아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미디어펜=김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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