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통상과 교류를 강조했던 건국대통령

독립정신으로 돌아가자! 대한민국 시장경제의 근본, 이승만

   
▲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

1. 한반도의 현실, 박정희와 이승만

삼면은 바다이고 북방면은 휴전선으로 둘러싸인 우리나라 국토는 고립된 섬과 다를 바 없다. 면적은 일본 본토인 혼슈 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반도에는 내세울 만한 부존자원 하나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인적자원 밖에 없는 섬이다. 솔직해지자. 우리나라는 ‘자유무역’, ‘시장경제’가 아니면 먹고 살 수 없는 나라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주도 통제경제를 고수하다가 시장에 ‘자유’를 허하면서, 수출(제조)기업에 인센티브를 부여했던 박정희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신의 한수’였다. 중국이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잠자고 있을 적의 일이다. 지난 50년 간 우리나라를 먹여 살렸던 대부분의 기업이 이 때 자라났다.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 8위의 무역대국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오해가 한 가지 있다. 경제사에 공헌한 ‘국부 이승만’에 대한 오해 말이다. 다수의 오해와 무지로 인해 이승만은 일각에서 혹평을 받는 위인이지만,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명철함과 리더쉽을 지닌 선각자였다. 거의 모든 일을 혼자서 떠안아야 했던 시대의 거인이었다.

   
▲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건물 짓기에 수고한 목수들이었다. 

수백 년 뒤 한국 역사서에 기록될 20세기 인물은 단 3명이라고 생각한다.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김일성. 이 중 이승만은 첫 손에 꼽힌다. 건국을 통해 대한민국의 정의를 내리고 그 토대와 방향을 닦았다는 점에서 박정희와 구별된다. 우리나라를 그간 먹여 살린 대부분의 기업이 ‘박정희’ 정권 시절 성장했다면, 그 기업 거의 모두는 ‘이승만’의 시대에 태어났다.

사실 1953년 체결한, 지정학적으로 경제학적으로 무한한 가치를 지닌 한미군사동맹 하나만으로도 이승만은 다른 누구와도 선을 긋는 인물이다. 한미군사동맹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전쟁 이후, 황폐했던 국토와 산업의 기반을 다시금 다질 수 있었다. 박정희 이후 역대 정부 모두가 경제정책 드라이브를 갈 수 있었다. 모든 기업과 개인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초강대국들로 둘러싸인 동북아의 조그마한 반도에서 갖은 전술적 판단을 통해 대한민국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펼쳤던 달변가였다. 박정희가 ‘신의 한수’였다면 이승만은 ‘신의 사자’였다.

 

2. 최초의 의문, 왜 1948년 제헌 헌법은 ‘사회주의 통제경제’를 표방했을까

1948년 7월 공포된 제헌 헌법은 재산권을 보장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통제경제’를 표방했다. 특히 6장 <경제> 부문의 84~89조는 사회정의 실현, 균형있는 국민경제, 자원․산업․민간기업에 대한 국유화, 대외무역에 대한 통제, 농지분배를 규정함으로써 명백히 국가 주도의 통제경제를 선언하고 있다.

이상하다. 의문이 뒤따른다. 대한민국은 명백히 시장경제의 나라, 자유민주주의의 나라이다. 그래서 1948년 건국과 더불어, “왜 경제에 있어서만큼은 국가가 거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통제경제체제로 시작했을까” 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도출된다.

1948년 7월 17일 제헌 헌법

제15조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 공공필요에 의하여 국민의 재산권을 수용, 사용 또는 제한함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상당한 보상을 지급함으로써 행한다.

제18조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제6장 경제

제84조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

제85조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 공공필요에 의하여 일정한 기간 그 개발 또는 이용을 특허하거나 또는 특허를 취소함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제86조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

제87조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까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공공필요에 의하여 사영을 특허하거나 또는 그 특허를 취소함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 하에 둔다.

제88조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긴절한 필요에 의하여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또는 그 경영을 통제, 관리함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제89조 제85조 내지 제88조에 의하여 특허를 취소하거나 권리를 수용 사용 또는 제한하는 때에는 제15조제3항의 규정을 준용한다.

 

3. 의문에 대한 답 : 모든 것이 최악이었던 대한민국 경제 현실

일제의 항복 선언 이후 70만 명에 달했던 한반도 거주 일본인은 도망치듯 일본으로 돌아갔다. 해방 당시 주요산업시설의 94%가 일본인 소유였고 제조업 기술자의 80% 이상이 일본이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공장이 멈춰 섰고 심각한 물자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전체 공장의 절반은 문을 닫았고 기계가 있어도 가동을 못했다. 주인 없는 기관이나 공장 모두 남아 있는 한국인 직원끼리 재산, 기계설비, 원자재를 나눠 갖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남한에서 단독으로 총선거를 실시한 직후, 북한은 전기 공급마저 끊어 남한 전체는 밤마다 암흑천지로 바뀌었다. 남한의 전력 소비량 중 70%를 북한의 전기 공급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가정용 땔감, 각종 연료도 바닥나 흡사 석기시대로 돌아간 것처럼 생활하기도 했다. 광부들이 파업한 것은 아니지만 석탄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다.

   
▲ 초대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제헌헌법에서 서구식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명문화하고, 재산권보호 등 시장경제발전의 토대를 쌓았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아 공업화에 투자함으로써 한강의 기적을 창조하는 데 밑거름역할을 했다. 

당시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의 국민들에게는 세금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1946년 세금으로 걷은 돈은 나라 예산의 5~6%에 불과했다고 한다. 나라의 금고는 비어 있었다. 필요한 자금은 미국으로부터 원조 받는 돈과 중앙은행에서 종이돈을 찍어내는 것으로 충당했다. 결국 물자부족 속에 미군정이 필요한 돈을 통화 증발을 통해 의존해서 해방 이후 3년 간 물가는 30배 이상 올랐다.

이러는 가운데 인구는 급속도로 늘었다. 만주와 해외 각지에서 귀국하는 이가 속출했으며, 북한 김일성의 무상몰수로 인해 토지를 빼앗기고 월남하게 된 이북 사람들도 가세해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조선은행 통계연보에 따르면 남한 인구는 1944년 1656만 명에서 1946년 1937만 명으로 늘었다(2년 간 280여만 명 증가).

남한은 당시 얼마나 못 살았을까. 1941년은 일제 강점기 중 가장 경제가 좋았던 시기라고 한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 기준으로 따져서 1941년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26년이 지난 1968년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35달러. 1940년대 후반의 남한은 지구상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

   
▲ 67년 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 당시 기념식 전경.

당시의 사회주의적인 분위기와는 별개로, 이승만은 제헌 헌법에 이처럼 참담한 경제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던 시점이었다. 국민경제라고 부를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대한민국 경제는 제로베이스였던 것이다. 국가가 공익, 국민경제를 위해 사유재산권의 제한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기획력 실행력을 갖춘 당시의 극소수 테크노크라트들을 이끌며 이승만은 고군분투했다. 제헌 헌법에서 규정한 통제경제 방식의 법조항은 그 수단이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존재치 않았던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이승만은 필요악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이승만이 초대 건국대통령으로서 1948년 8월 15일 건국일에 광화문에서 선포했던 건국연설에서도 드러난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의 건국연설 中 (광화문에서 거행한 정부 수립 선포식에서)

정부에서 가장 전력하려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 정도를 개량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는 정부나 사회에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양반들의 생활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런 사상을 다 버리고 새 주의로 모든 사람의 균일한 기회와 권리를 주장하며 개인의 신분을 존중히 하며 노동을 우대하여 법률 앞에는 다 동등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 정부의 결심이므로 전에는 자기들의 형편을 개량할 수 없는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주의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 정부에 결심하는 바는 국제통상과 공업 발전을 우리나라의 필요를 따라 발전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생활정도를 상당히 향상시키려면 모든 공업에 발전을 꾀하여 우리 농장과 공장의 소출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는 없는 필요한 물건을 수입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즉 공장과 상업과 노동은 서로 떠날 수 없이 함께 병행 불패해야만 될 것입니다. 경영주들은 노동자들을 이용만 하지 못할 것이고 노동자는 자본가를 해롭게 못할 것입니다.

이승만은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갖게 하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른 농지개혁을 약속했고, 노동자에 대해서는 ‘기업에 대한 이익균점의 권리’를 보장했다. 자기들의 형편을 개량할 수 없는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조치였다. 다만 농지개혁에 있어서 유상분배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농민들에게 재산권, 소유의식을 심어주었다. 이는 6.25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큰 힘이 작용했다.

6.25 전쟁 이후의 경제 상황은 발제자 김용삼 연구원께서 충분히 다루셨기에 추가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전 국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전쟁의 참화를 대변하는 일화 하나만 소개한다. 1958년 1월 14일자 국무회의록에서 언급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이다.

“우선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기술을 우리 국민에게 가르쳐야 한다. 문 장식, 자물쇠 같은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변소도 외국인 같이 돈을 많이 들일 수는 없지만 냄새는 안 나게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기술자가 없다. 관저(경무대) 2층에 변소를 고칠 기술자를 추천하여 주면 좋겠다.”

 

4. 재산권을 확립하고 보호했던 이승만

북한에서는 소련 고문단의 지도 아래 일본 기업 국내 기업을 비롯한 모든 사업체의 국유화가 이루어졌다. 당시 남한에서도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제헌 헌법에 남아있는 산업․사기업에 대한 국유화 조항이 이를 대변하는 증거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승만의 생각과 1945년 한반도에 들어왔던 미군정청의 입장은 일치했다. 기본적인 입장은 국유화 반대였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업은 민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미군정청은 적산기업 처리를 새로 수립되는 한국 정부에 넘기게 되었고 이에 대한 처리 원칙을 국유화가 아닌 민영화로 정했다. 이승만은 이를 이어 받아 적산기업의 대다수를 민간에게 넘긴다. 몰수한 일본 재산을 우리나라 민간기업의 재산으로 확립한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기업 역사의 시작이다.

   
▲ 1899년 대역죄(大逆罪)로 한성감옥에 수감된 이승만은 1904년 '독립정신'이라는 불후의 명저를 집필했다. 110년 전에 쓰여진 책이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외교전략과 국가정신이라는 면에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재산권 확립의 방점을 찍었다. 북한과 달리 땅값을 치른 유상몰수 유상분배였다. 전 농민을 국가의 소작농으로 전락시킨 북한 김일성과 달리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통해 대다수의 농민을 재산권자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조선왕조의 전통적 지주제도를 일시에 해체했으며, 농민의 마음을 사서 공산화를 막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본인 사유재산제도를 다졌다.

“북한은 모든 인민을 국가의 노예로 삼았지만, 남한은 이승만으로 인해 모든 이가 주인으로 거듭났다.”

전통적 지주계급이 해체됨에 따라 분배 면에서도 거의 모든 농민이 평등하게 농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자작농은 전 농지의 92%를 자신들의 소유로 삼았으며, 수많은 농민들이 농산물과 농지를 자유로이 사고 팔게 됨으로써 시장경제가 발달했다.

물론 이에 대한 희생은 적지 않았다. 이승만은 기존의 농업자본이 산업자본을 전환되기를 기대했으나, 애초의 의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북한 김일성이 침략한 6.25 전쟁 때문이다.

전쟁 직전에 농지개혁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각 지주들에게 지가증권이 주어졌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극심한 전쟁 인플레이션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토지보상대금으로 받은 지가증권이 휴지조각으로 전락했다. 기존 지주 거의 대부분은 몰락했다. 이 점이 대만과 우리나라의 다른 점이다. 대만은 우리나라와 달리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에 성공함으로써 건실한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 발전을 이루었다.

우리나라의 농지개혁, 토지개혁은 지주들의 피와 재산을 담보로 이루어졌다. 대한민국식 자본주의가 지닌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5. 이승만의 독립정신, 대한민국의 원류 그리고 미래

과거로 더욱 거슬러 올라가고자 한다. 대한민국. 모든 것의 시작은 1904년 한성감옥에서였다. 아래 글은 29살 이승만이 옥중에서 썼던 독립정신에 나오는 말이다.

실천 6대 강령 <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中

“설령 남의 도움을 받아 형편이 좋아지게 될 기회가 있거나 먹고사는 것이 좋아지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같은 도움을 거절해야 한다. 독립심을 가지고 지식과 기술을 배워 높은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본받으려 한다면 그들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지난날 사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이 차츰 변하여 자립정신을 가지고 사회에 기여할 것이다.”

통상과 교류는 이로운 것이다 中

“오늘날 세계에서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들은 서로 통상하면서 교류하는 가운데 이렇게 발전된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개명한 시대를 맞아 우리나라도 잘만 한다면 그들처럼 발전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 (중략)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해를 끼치거나 무엇을 빼앗으러 오는 것이 아니다. 통상하고 교류하여 서로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들을 막을 수도 없고 막을 이유도 없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옛날보다 몇 배 더 열심히 일하여 그들이 하는 것을 배우고 본떠서 그로부터 이익을 얻어 그들처럼 되어야 할 것이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화를 당하게 된다 中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그 나라가 누리는 영광과 번영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더라도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은 모두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재산을 한 푼이라도 빼앗아 가는 사람이 없다. 그들의 자유와 권리는 보호되며, 아무도 그것을 침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행복해지고, 서로 돕고 위로하는 가운데 인정과 우애가 커진다. 상업과 무역을 권장하여 다른 나라로부터 재물과 금은보화를 벌어들이고, 공업과 농업을 진흥시켜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사람의 가치도 매우 소중히 여긴다. 기계는 편리하고 빨라서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며, 모든 사람이 골고루 교육을 받게 되고, 도덕과 신의를 소중히 여긴다. 누가 신사숙녀인지 자연히 드러나며, 순리가 통하고 법률이 공평하게 적용되어 나쁜 사람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약한 사람이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

 

6. 이승만의 꿈, 우리에게 남겨진 몫

“독립심, 책임감, 자립정신을 지닌다. 통상과 교류를 통해 서로를 이롭게 한다. 재산을 포함한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며 아무도 이를 침해할 수 없다.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위로한다. 도덕과 신의, 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순리가 통하고 법률을 공평히 적용한다.”

이는 이승만이 100년 전 꿈꾸던 우리네 모습이다.

   
▲ 미주이승만기념사업회가 김문수 전 지사 일행을 환영하고 있다. /사진=김문수 페이스북 캡처

이승만은 남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았다. 시대의 위인으로서 그 사명을 감당했다. 대한민국의 근본을 정하고 미래를 꿈꾸었다. 서두에서 박정희를 ‘신의 한수’ 이승만을 ‘신의 사자’라 불렀지만, 그가 옥중의 죽음 앞에서 절대자를 정녕 만나 신의 사자로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 하나가 있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커졌지만 “이승만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아있는 우리들이 이를 기억하고 이루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 할 차례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의 몫이다.

“역사를 비하하는 사람은 역사를 말할 자격조차 없다.”

단재 신채호의 말이다. /김규태 재산권센터 간사